이유생
이유생 전 대한중고등학교태권도연맹 회장이 지난 1990년 회장기에서 대회기를 전달하는 모습.
이유생(80) 전 대한중고등학교태권도연맹 회장은 태권도 현대사 증인이자 세계화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지난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중고연맹 8~9대 회장을 역임한 그는 국내,외에 국기 태권도를 보급하고 알리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1세대 태권도인은 어느덧 70~80대가 됐다. 그들은 단지 신체단련을 위한 태권도의 길을 걸었던 게 아니다. 몸과 마음, 정신의 조화에 가치를 두고 태권도 세계화에 앞장서왔다. 스포츠서울은 태권도 국기 지정 1주년을 맞아 6회에 걸쳐 숨은 영웅 이유생 전 중고연맹 회장의 업적을 짚어봤다. <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1939년 3월15일생인 이유생 전 대한중고등학교태권도연맹 회장은 대구 능인고와 연세대 산업대학원,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한 뒤 1970~1980년대 단열재 생산업체인 화신기업 대표이사를 지냈다. 그가 태권도와 인연을 맺은 건 1980년대 말 대학 동문회에서 고인이 된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만나면서다. 태권도는 1988 서울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선을 보였지만 국내 매스컴으로부터 비인기 종목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 다만 해외에서 태권도는 의협심과 예절, 용기와 질서 의식을 바탕으로 정서적인 면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뚜렷한 온도 차를 보였는데 김 회장은 어느 때보다 종주국으로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라고 여겼다. 대학 동문들로부터 평소 호탕한 성격에 매사 꼼꼼한 성향으로 남다른 리더십을 뽐낸 이유생 회장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이 회장에게 당시 사무실 하나 없이 보따리상 취급을 받은 중고연맹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태권도인 출신이 아닌 그는 반신반의했지만 김 회장과 관계자의 진중한 뜻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는 1988년 태권도 미래의 젖줄을 구실을 해야 하는 중고연맹의 제8대 회장으로 부임했다.

‘회장으로 모셔온’ 셈이지만 이 회장은 그야말로 텃밭부터 가꿔야 했다. 사무실하나 마련돼 있지 않은 중고연맹 수장직에 앉았던 그는 당시 기억을 더듬더니 “보따리 장수가 따로 없었다. 사무 공간은 있어야 업무를 추진하는 데 효율성이 있는데 이리저리 옮겨가며 사람을 만나러 다녔으니…”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화신기업 본사가 있었던 서울 강남구 역삼동 대명빌딩 내에 중고연맹 사무국을 임시로 차렸다. 집기를 갖추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를 가장 허탈하게 한 건 연맹 기금이 한푼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까지 회장단에게 의존하는 예산 지출 형태로 중고연맹이 대회를 끌고 온 것이었다. 그는 회장이 바뀌더라도 중고연맹이 운영될 자립 구조부터 갖춰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고연맹 이사 등 태권도인부터 연맹에 회비를 내는 풍토조성을 마련하려고 발에 땀이 나도록 동분서주했다. 그는 “회비를 내는 풍토 뿐 아니라 중고연맹이 진정으로 존재 가치를 얻으려면 일선 지도자와 선수를 위해서 존재해야 했다”며 “당시엔 태권도계가 비리도 많았고 임원과 심판이 묶여 있는 등 실소가 나올 정도로 사정이 좋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회장 부임 이후 임원부터 전부 교체했다. 각 지역 중고 태권도 지도자로 꾸렸다. 또 심판진도 교체했는데 개혁적인 행정으로 내게 ‘오래살고 싶으면 똑바로 하라’는 등 협박 전화도 많이 왔었다”고 고백했다. 내홍을 겪긴 했지만 달라진 중고연맹 분위기에 중고 태권도 지도자들이 이전보다 솔선수범하며 행정에 참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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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를 갖춘 뒤 중·고 태권도 활성화를 위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홍보였다. 당시 프로스포츠 뿐 아니라 민속씨름이 지상파 생중계를 통해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돋움했듯 태권도도 신문과 TV 중계방송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그때 씨름만 하더라도 한 방송국에서 1년에 3억씩 중계권료를 지급하고 방송을 했다. 그때 3억이면 엄청난 액수 아니냐”며 “나 역시 방송국 문을 두드렸는데 당시 모 편성부장은 ‘태권도를 누가 보느냐’면서 안 된다더라. 광고, 스폰 따위 전혀 붙지 않을 것이라면서 중계 협조 공문이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일쑤였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이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보도국장과 제작국장, 사장까지 찾아가 국기 태권도 보급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회장은 “끈질기게 다가가니까 한 방송국에서 1시간 생중계하려면 1억 5000만 원이 필요하다더라. (방송은 해줄테니까)우리보고 돈을 내라고 했다. 스폰서가 없으니까”라며 “그렇게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태권도에 대해 마음을 열더라”고 웃었다. 마침내 1988년 7월 국기원에서 열린 제24회 대한태권도협회장기 겸 제15회 중고연맹전이 1시간 동안 지상파 생중계를 탔다. 당시 생방송 유치 비용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이 회장은 한달간 장출혈로 병원신세를 졌다고 한다. 그는 “어느덧 중계방송이 활성화하면서 국기원에 침대 광고 등이 붙더라. 몇 백만원 정도 규모였지만 그때로선 정말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①편 끝>kyi0486@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