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이상훈 기자] 암호화폐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제대로 개발되지 않는 프로젝트들이 늘어나자 거래소들이 상장한 코인에 대한 ‘상장폐지’ 제도를 속속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간 거래소들은 자체적으로 상장심사팀이 프로젝트를 분석하고 해당 팀과의 미팅 등을 통해 상장을 결정했다고 밝혔던 만큼, 상장폐지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 투자자들의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업비트 유의종목 지정사유예시
업비트의 암호화폐 유의종목 지정사유 예시.  출처 | 업비트

주요 암호화폐 거래소들 중 가장 먼저 상장폐지 기준을 공개한 곳은 업비트(UPBIT)다. 업비트는 지난해 10월 상장폐지 기준을 밝혔다. 업비트는 ▲법령에 위반되거나 유관기관의 지시 또는 정책에 의해 거래지원이 지속되기 어려울 경우 ▲해당 암호화폐의 실제 사용 사례가 부적절하거나 암호화폐에 대한 사용자들의 반응이 부정적인 경우 ▲해당 암호화폐의 기반 기술에 취약성이 발견되는 경우 ▲해당 암호화폐가 더 이상 원래의 개발팀이나 다른 이들로부터 기술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등이 발생하면 상장폐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업비트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상장폐지 공지 후 10일 뒤에 상장폐지한다. 이어 업비트는 상장폐지 후 30일간 암호화폐 출금을 지원하고, 그 뒤로는 상장폐지된 암호화폐의 입출금이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이미 업비트는 상장 유지를 위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스피어(SPHR), 엣지리스(EDG), 구피(GUP), 머큐리(MER), 뫼비우스(MOBI), 블록틱스(TIX), 솔트(SALT) 등의 코인을 상장폐지한 바 있다.

코인원 암호화폐 상장심사 기준
코인원의 암호화폐 상장심사 기준. 상장폐지는 이 상장심사 기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이뤄진다.  출처 | 코인원

업비트에 이어 코인원도 지난 8월, 상장폐지 기준을 밝혔다. 8월 8일 ‘루니버스 파트너스데이’에 참석한 강명구 코인원 부대표는 “코인원이 검토했던 프로젝트의 95%가 심사자격 미달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상장을 위한 심사 의뢰는 많지만 투자자들이 믿고 투자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프로젝트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이에 코인원은 ▲코인 가격이 조작되거나 시장 교란 행위가 포착되는 등 법적 문제 발생할 경우 ▲블록체인이 원활하게 운영되지 않는 등 기술적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거래량이 매우 낮은 경우 ▲팀이 해체되는 등 프로젝트 영속성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등의 요건이 하나라도 발생하면 경고를 하고, 경고가 누적되면 상장폐지된다고 설명했다.

빗썸은 거래소에 상장된 모든 암호화폐에 대해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상장 유지 여부를 판단하고 심사하는 상장 적격성 심의 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지난 8월 발족시켰다. 위원회는 매월 빗썸에 상장된 모든 암호화폐에 대한 상장 적격성 여부를 심사한다. 심사를 통해 상장 적격 판정을 받은 암호화폐는 상장이 유지되지만 상장 폐지 대상으로 선정된 암호화폐는 투자유의종목으로 지정되며, 2개월 이내 개선이 없으면 상장이 폐지된다.

구체적으로 상장폐지 대상이 되는 경우는 ▲거래소내 일 거래량이 미미하고, 그 기간이 1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 ▲기준시가총액이 상장시 시가총액 대비 크게 하락하고, 그 기간이 1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 ▲암호화폐 개발자의 지원이 없거나 프로젝트 참여가 없는 경우 ▲블록체인 또는 암호화폐에 연관된 기술에 효용성이 없어지거나 결함이 발견된 경우 ▲형사상 범죄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기타 형사사건과 연관성이 명확한 경우 ▲암호화폐 재단에서 상장폐지를 요청하는 경우 등이다.

이와 함께 빗썸은 9월부터 학계, 법조계, 금융공학, 기술 전문가들로 구성된 외부 자문위원단을 운영하며 투자자 보호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빗썸은 1일부터 거래소 홈 화면을 개편하고, 상장된 암호화폐들을 메인·일반·신규 항목으로 나눠 노출하기 시작했다. 빗썸은 조만간 홈 화면에 투자유의 항목을 추가할 예정이다.

빗썸 홈 화면
빗썸은 10월부터 거래소 화면을 메인·일반·신규로 분류해 제공하고 있다. 조만간 튜자유의 항목이 추가될 예정이다.  출처 | 빗썸

상장폐지 기준에 대해 김영진 빗썸 CFO는 “아직 빗썸은 상장폐지를 한 적 없지만 투자자 보호 위해서는 (상장폐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며 “다만 빗썸 내부에서 독단적으로, 급작스럽게 상장폐지를 결정하게 된다면 투자자 피해가 발생하거나 시장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어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상장폐지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코빗
코빗의 암호화폐 상장 및 상장폐지 프로세스.  출처 | 코빗

코빗(KORBIT)도 지난달 3일, 암호화폐 상장폐지 기준을 공개했다. 코빗은 ▲범죄·시세조작 등의 법적 문제 ▲프로젝트의 기술적 문제와 함께 투자 판단을 위한 불성실 공시를 포함하는 질적평가와 거래량 미달 ▲공정한 거래를 위한 시가총액 수준 미달 등에 대한 양적평가를 그 기준으로 상장폐지를 검토하며, 이 기준 중 한 가지라도 해당된다면 상장폐지 경고 후 상장폐지 절차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국내 주요 암호화폐 거래소 모두 상장폐지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알트(AltCoin, 비트코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코인) 시세가 2년 가까이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중 몇몇 코인이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가격이 폭락하고 거래량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등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 6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37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암호화폐 규제에 관한 권고안을 확정해 발표한 것도 상장폐지 기준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FATF가 암호화폐 송금인과 수취인에 관련된 정보를 암호화폐 거래소가 수집, 보유해야 한다는 점을 권고함에 따라 거래소들은 송금자와 수취자를 파악하기 어려운 ‘다크코인’ 류를 잇달아 상장폐지시켰다.FATF의 권고안에 맞춰 거래소에서 퇴출된 다크코인들은 모네로(XMR), 대시(DASH), 지캐시(ZEC), 호라이즌(ZEN), 슈퍼비트코인(SBTC) 등이 있다.

한 암호화폐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거래량이 미미하거나 프로젝트 개발이 로드맵대로 지켜지지 않는 암호화폐를 퇴출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거래소에서 해당 프로젝트의 우수성을 내세워 상장했던 것을, 이제 와서 상장폐지하려 하는 것은 상장 당시 프로젝트와 거래소를 믿고 투자했던 이들에게 2차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만큼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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