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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게은기자]기타리스트가 꿈이어서 밴드 활동으로 갈증을 풀었던 한 소년은 자연스레 작곡가를 목표로 두게 됐다.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한 패기와 달리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지만 잘 이겨내 스타 작곡가로 성장했다. ‘히트곡 제조기’ 박근태 이야기다.
1993년 데뷔해 음악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박근태는 자타 공인 작곡계 미다스의 손이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박근태의 곡은 370여개에 달한다. 젝스키스 ‘폼생폼사’, 다비치 ‘사고쳤어요’, 휘성 ‘사랑은 맛있다’, 아이유 ‘하루 끝’, 이선희 ‘그중에 그대를 만나’등 박근태의 손을 거친 스타 가수와 히트곡은 무수하다. 26년째 댄스부터 발라드까지 트렌디하게 넘나들며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박근태다.
그에게는 롱런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작곡법이 있었다. 박근태는 “가수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노래도 직접 들어보는 등 매력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2~3주 동안 콘셉트에 대해 생각하고 가수가 이 곡으로 인해 긍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지까지 고민한다. 방향이 정해지면 곡 장르를 결정하거나 멜로디를 만드는, 음악적으로 투영되는 과정은 수월하게 흘러간다”라고 말했다.
워낙 노련한지라 곡이 완성되는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박근태는 “곡 콘셉트만 정해지면 멜로디는 빠르면 2분 만에 나오고 보통은 10분 내외로 만들어진다. 충분히 고민을 했어도 제가 생각하는 곡이 나오지 않으면 과감하게 작업을 접고 다시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천재성이 가득해 보이기도 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었다. 우여곡절과 노력이 뒤엉킨 끝에 도출된 박근태 표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는 “데뷔 초기에는 잘하는 것 위주로 곡을 만들었고 가수의 목소리에 집중한다던가 아이디어를 내본다던가 등 많은 걸 고려하지 못했다. 2000년 슬럼프가 왔을 때 1년 가까이 무능의 상태인 적이 있었는데, 이걸 겪은 후 가수의 목소리나 디테일한 요소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지금의 제 방식은 2001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인데 고민하는 과정은 늘 어렵다”라고 밝혔다.
곡에 대해 갖는 책임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다. 박근태는 “제 곡이 큰 사랑을 받게 되면 뿌듯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깨도 무거워진다. 제가 만든 곡에 가수의 인생도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잘해야 한다는 마음도 더욱 커진다. 또 작곡가로 오래 활동을 해보니 사회적인 책임감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박근태는 다작을 하는 작곡가는 아니다. 이 역시 슬럼프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박근태는 뛰기보다 걷기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30대 초반까지는 100m 달리기하듯 앞뒤 안 보고 뛰었다. 하지만 슬럼프 이후 작업 방식이 바뀌자 음악가로서의 삶이 마라톤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완주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체력 안배를 잘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든 거다. 중간에 제풀에 꺾여 쓰러질 수 있는 상황을 경계한다. 또 꼭 필요한 작업만 하자는 생각도 있다. 진짜 제 곡을 원하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가 갖고 있는 소신에 대해서도 물었다. 베테랑 작곡가가 반드시 지키는 자신만의 규칙은 무엇일까. 박근태는 “자기복제를 하지 말자는 거다. 예를 들면 2004년 제가 만든 SG워너비 ‘Timeless’가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니 소몰이 창법이 주가 된,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이 많이 탄생했는데 저는 그 후 ‘Timeless’ 느낌의 곡을 한 곡도 만들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유행을 만들어놓고 왜 더 이상 만들지 않냐며 기회손실이라고 했다. 저는 소신 때문에 그렇게 한 거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오히려 신화 ‘Brand New’, ‘조PD ‘친구여’, V.O.S ‘눈을 보고 내게 말해요’ 등 다른 장르의 곡을 만들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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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박근태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