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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이 ‘Man of the Year’ 우승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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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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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이 유도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다.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글.사진 이주상기자] “우승을 한 나보다 친구인 아룬이 더 많이 울더라. 너무 고마웠다. 대회가 끝나고 헤어진 후 서로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보낼 정도였다. 지금도 연락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이 듬뿍 담겼다. 지난 9월 미얀마에서 열린 국제적인 남자미인대회인 ‘Man of the Year’에서 우승한 이호진(26)은 부드러운 얼굴선이 말해주듯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다. 룸메이트인 말레이시아의 아룬 조프라가 눈물을 흘리며 축하해줬을 정도니 그의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다. 피트니스 모델 뺨치는 라인을 자랑하고 있는 이호진은 보름 가까이 합숙을 하며 조프라에게 운동법과 식단관리법을 챙겨주며 친해졌다.

지금은 182㎝에 75㎏의 날렵한 몸매지만 한때는 90㎏을 상회했다. 이호진의 전직은 헤비급 유도선수. 2011년 서울시유도대회 90㎏급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촉망받는 선수였다. 그에게 유도는 숨길 수 없는 유전자와도 같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의 유도영웅’으로 불렸던 이창수씨고 어머니는 대만 유도 국가대표출신인 진영진씨다. 이창수씨와 진영진씨의 러브스토리는 국경을 넘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호진은 “아버지가 1991년에 귀순하셨다. 그때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어머니다. 당시 대만에 계셨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열정에 반해 결혼까지 하셨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서 건강한 신체는 물론 감성, 열정, 낭만을 물려받은 이호진이다.

- ‘Man of the Year’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로 등극했다. 소감은?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한국대회를 준비하던 게 얼마 전인데 세계대회에 참가해 우승까지 하게 됐다. 주어진 상황에 항상 최선을 다했던 것이 좋은 결실을 맺게 됐다.

- 우승 후 현지에서 많은 프로모션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미얀마를 시작으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4개국 8개 도시를 방문했다. 미얀마에서는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 태국에서는 모델 에이전시와 광고관련 미팅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는 영화촬영에 관한 미팅을 했다. 계약 등 구체적인 내용은 진행 중이다.

- 우승 후 여성팬들의 반응이 대단했다고 들었다.

한류스타가 된 기분이었다.(웃음) 동남아시아의 한류 열풍은 대단하다. 많은 스타들이 쌓아 놓은 인기 덕(?)을 많이 봤다. 우승을 했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나를 알아봤다. 사인과 촬영 요청이 많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내가 하는 행동이 한국의 이미지를 좌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 프로필이 궁금하다.

1993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용인대학교에서 유도학과와 중국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 유도를 배우게 된 계기는?

유도선수였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1991년에 북한에서 귀순한 이창수씨다. 당시 북한 유도국가대표팀의 주장이셨다. 어머니도 대만 유도선수로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다. 집안 분위기 때문에 유도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다. 두 동생도 유도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동생들과는 같은 중고등학교에서 합숙생활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돈독하다.

- 아버지과 어머니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하다.

아버지는 북한의 유도영웅이셨다. 훈장도 4개나 받고 체육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인 공훈체육인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동상도 세워질 정도로 유명한 선수였다. 그런데 1990년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선수에게 졌다는 이유만으로 탄광에 끌려가 석탄을 캐셨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내 자식만은 북한에서 낳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 후 북한의 실력자인 장성택(작고)의 도움으로 풀려났지만 1991년 바르셀로나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북한으로 가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하게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88년도 세계대회에서 처음 만나셨다. 세계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두 분은 선수숙소에서 기다리며 선물을 주고받는 등 몰래 사랑을 키우셨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어머니와 함께 출전한 대회에서 어머니에게 “나는 한국에 갈 거야. 한국에 가서 널 찾을게”라고 다짐을 하셨다. 어머니는 당시 ‘북한 사람이 어떻게 한국에 가지?’라며 의아해하셨는데 어느 날 대만신문 1면에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이창수가 대만의 진영진을 찾는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어머니도 한국으로 오셨다. 그렇게 두 분이서 친척 한 명 없는 한국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현재 아버지는 남자 유도국가대표팀의 트레이너로 선수들을 돕고 있고 어머님은 아버지와 세 아들을 돌보고 있다.

- 최근에 첫째 동생인 이문진의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10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2019 아부다비 그랜드슬램’ 남자 81㎏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내년에 열리는 도쿄 올림픽 출전에 청신호가 될 것 같아 가족들이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

- 이번 ‘Man of the Year’ 우승 후 부모님과 형제들의 반응은?

2nd 러너업, 1st 러너업, Winner 이런 식으로 수상자가 호명이 되는데 부모님과 동생들은 실시간으로 보면서 1st 러너업이 1등을 말하는 건 줄 알고 내 이름이 없어서 너무 아쉬워했다. 그런데 갑자기 “위너 코리아”라고 호명한 후 내가 단상에 올라와서 엄청 놀랐다고 하더라. 내가 1위를 하고 얼마 안가 동생도 아부다비에서 열린 세계유도대회에서 1위를 해서 주변에서 “세계대회 1위 형제들”이라고 축하해주신다. 특히 어머니께서 굉장히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

- 특기와 취미는?

특기는 유도와 중국어이고 취미는 도전이다. 나는 도전을 통해 가치를 증명하는 사람이다. 인생은 늘 크고 작은 도전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매년 작성한 버킷리스트를 지우는 것이 취미다.

- 롤모델은?

당연히 아버지다. 내가 대한민국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아버지는 가지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식들을 위해 한국으로 오셨고 지금까지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으셨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항상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주셨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고 들었다. 내가 지금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어머니의 영향으로 중국어를 잘 하게 됐다. 교환학생으로 대만에서 공부도 했다. 대만에서 공부할 때는 대만을 찾는 한류스타들의 통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런 인연으로 대만 TV토크쇼에 한국대표로 출연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야기를 나누는 등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은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방송에도 관심이 많다. 모델 활동과 더불어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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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이 유도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다.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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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이 유도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다.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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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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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이 ‘Man of the Year’ 우승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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