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

[스포츠서울 정하은기자]“드디어 이 인물이 나에게로 왔구나 싶었어요.”

배우 김호정(52)이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본 당시를 떠올렸다. 구분지어질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 속에서도 우리 인생의 가장 선명했던 순간들은 있다. 영화 ‘프랑스여자’(김희정 감독)는 기억과 환상, 현실과 꿈의 경계를 오가는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지난 4일 개봉해 독립영화 흥행의 기준이라 불리는 1만 관객을 개봉 일주일 만에 돌파한 ‘프랑스여자’는 20년 전 배우의 꿈을 안고 프랑스 파리로 떠난 미라(김호정 분)가 서울로 돌아와 옛 친구들과 재회한 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특별한 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20대의 과거와 40대인 현재 사이 혼란스러운 기억들 속에 부유하는 미라의 모습을 통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영화는 조명한다.

2017년 겨울에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는 김호정. 그는 “감독님께서 직접 전화를 하시고 집에 오셨다.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 ‘드디어 이 인물이 나에게 왔구나’ 싶어서 바로 하겠다고 얘기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그리고 바로 불어 레슨을 붙여달라고 했다. 불어 선생님과 대사 연습을 하며 준비했다”고 말했다.

극 중 프랑스에서 20년간 산 미라를 연기하기 위해 김호정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바로 언어였다. 불어 대사를 능숙하게 소화하기 위해 김호정은 긴 시간을 프랑스인 남편 역할의 배우 알렉상드르 구앙세와 자연스러운 악센트를 연습하는데 썼다. 김호정은 “감독님께선 부담감 없이 그냥 저를 표현하면 된다고 했지만 저는 또 그렇지가 않더라. 프랑스 사람들이 흥분하면 말이 빨라지는 부분을 캐치해 반복해서 연습했다”며 “대사 뿐만 아니라 실제로 미라가 입었던 옷들 중 많은 게 제 실제 의상이다. 촬영회차가 길진 않았지만 사전 작업을 꽤 길게 준비한 작품이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김호정2

그래서일까. 미라라는 인물은 마치 김호정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닮아 보였다.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김희정 감독은 7년 동안 폴란드 유학 생활과 1년여 동안의 프랑스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여자’의 시나리오를 고안했다. 김호정은 “감독님께서 그냥 처음부터 저랑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낯설음’ 때문에 캐스팅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모두에게 알려진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철저하게 그 역할의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하신 거 같다”며 “전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인물로 들어가고 받아들이고 봐주신다면 배우로서 성공한 것이라 생각한다”며 미소지었다.

미라는 한국과 프랑스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해 있지 못한 인물이다. 젊은 시절 배우를 꿈꾸며 당차게 파리로 유학을 갔지만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 후 20년을 살다 이혼한 뒤 한국으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미라는 젊은 시절 함께 꿈을 키웠던 영화감독 영은(김지영 분)과 연극 연출가 성우(김영민 분)을 만나면서 꿈과 현실을 배회하며 편린에 시달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함’을 유지하는 미라의 감정선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오히려 김호정은 미라가 곧 본인 같았고 그래서 더 몰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계인으로서 지켜보는 입장 너무나 저랑 똑같아 보였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당시가 연극과 영화만 하다가 드라마로 처음 영역을 넓혔을 시점이었다. 앞으로 나는 어떤 연기를 해야하고 어떤 역할을 맡아야할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미라의 상황이 나와 딱 맞더라. 공감되는게 많아서 더 잘 표현된 거 같다.” 실제로 김호정은 최근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초콜릿’, ‘하이에나’ 등으로 시청자들과 가깝게 만나고 있다.

프랑스여자

옛 친구들로 호흡을 맞춘 김지영과 김영민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먼저 김지영에 대해 “영화 속 모습과 똑같다. 털털하고 좋은 사람이다. 프랑스에서 촬영할 때 본인의 촬영 분이 없는데도 김지영 배우가 함께 와서 즐겁게 놀았다”고 회상하며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고, 김영민에 대해선 “대학을 졸업하고 제 연극의 코러스로 데뷔했다“고 남다른 인연을 전했다. 이어 ”워낙 단단한 사람이다. 신체를 쓰는 것에 있어 굉장히 뛰어난 배우다. 저는 ‘부부의 세계’를 못 봤는데 요즘 정말 잘 나가더라. 그러나 영민이는 그냥 영민이다. 늘 한결같은 사람이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여자’는 김호정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영화를 찍으며 그에게도 긍정적인 자극과 에너지가 됐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꿈과 희망 그리고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나만 인생이 이렇게 힘든가’ 생각할 때 자신과 비슷한 영화 속 주인공을 보며 공감하고 열광한다”고 운을 뗀 그는 “저 역시 그랬다. 이 시나리오 속 인물이 나랑 비슷한게 너무 많았고, 경계에 걸친 인물이란 점과 물리적인 나이까지 비슷해서 연기를 하며 고민하고 위로 받으며 스스로 떨쳐낸 부분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젠 경계인으로서 고민을 내려놓았다는 김호정은 “인생의 정답은 없는 것 같다. 피가 되든 살이 되든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해보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앞으로도 김호정은 다양한 차기작을 앞두고 있다. OCN 드라마 ‘서치’의 촬영을 앞두고 있는 김호정은 조만간 영화 ‘젊은이의 양지’(신수원 감독)으로 관객과 또 한 번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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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