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LA=문상열전문기자] 지난 21일(현지 시간) NBA 전 뉴욕 닉스 레전더리 센터 윌리스 리드가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NBA는 큰 별을 잃었다. 그가 갖고 있는 상징성은 매우 컸다.

스포츠의 메카 메디슨 스퀘어가든을 홈으로 사용하는 뉴욕 닉스는 1946년 NBA와 함께 창단된 이후 딱 두 차례 우승했다. 1970년과 1973년이다. 이후 두 차례 파이널 진출이 전부다. 센터 패트릭 유잉이 몸담았던 1994년과 1999년이다. 스포츠 최고 시장의 프랜차이즈 구단으로서는 매우 애석한 일이다.

리드는 루이지내아 주의 그램블링 스테이트를 졸업했다. 그램블링 스테이트는 미국의 역사적인 흑인 퍼블릭 대학이다. 리드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절의 남부는 인종차별이 노골적으로 벌어졌을 때다. 지금도 미국에서의 남부는 인종차별을 뜻하는 다른 단어이기도 하다.

4학년 때 경기당 26.6점, 21.3리바운드를 작성해 1964년 드래프트 때 뉴욕 닉스에 2라운드 전체 8번으로 지명됐다. 당시는 NBA에 9개팀이 있었다. 리드는 1964~1974년 10시즌을 뛰었다. 무릎 연골이 찢어져 선수 생활을 오래하지 못했다. 하지만 NBA 사상 최초로 올스타전,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했고, 닉스를 두 차례 정상에 올려 놓아 1982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센터로 큰 키는 아니다. 208cm로 요즘의 파워포워드다. 왼손 슈터다. 닉스의 1970, 1973년 우승의 파이널 MVP를 수상한데서 리드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샤킬 오닐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닉스를 두 차례 우승으로 이끈 감독은 레드 홀츠먼이다. 미국 스포츠 사상 최다 11차례 우승 타이틀의 주인공 필 잭슨 감독의 멘토다. 닉스 소속이었던 잭슨은 1970년 우승 때는 허리 부상으로 로스터에 없었고, 1973년 정상 탈환 때는 멤버였다.

리드는 요즘 국내에서 WBC 패배 이후 화두가 된 정신력의 화신이다. 1970년 LA 레이커스와의 파이널에서 보여준 경기에 임하는 태도, 결단력, 갈망, 리더십 등은 큰 승부에서 모범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리드가 7차전에서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터널을 지나 코트로 나설 때 닉스 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은 고전으로 재현된다.

1970년 NBA 파이널 우승은 레이커스에 기울어 있었다. 레이커스에는 샤킬 오닐보다 더 공격형 센터 윌트 챔벌레인이 버티고 있었다. 챔벌레인은 한 경기 100득점의 주인공이다. 1969-1970시즌 다른 해보다 다소 주춤했지만 경기당 27.3점, 18.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공격에는 슈팅가드 ‘미스터 클러치’ 제리 웨스트가 경기당 평균 31.2점을 작성했다. 웨스트는 LPGA 프로골퍼 미셀 위의 시아버지다. NBA 실루엣 로고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시리즈 3승2패로 앞선 닉스는 6차전에서 리드의 근육이 찢어지는 허벅지 부상으로 결장해 135-113으로 참패했다. 시리즈 3승3패가 됐다. 7차전 출장마저 어려워 닉스의 우승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닉스 팬들도 리드없이는 홈에서도 승산이 없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리드는 다리를 약간 절룩이면서 코트로 들어섰다. 팁오프가 된 뒤 닉스의 첫 두 번째 공격에서 리드는 2개의 골을 잇달아 성공했다. 27분 동안 그게 전부다.

하지만 리드의 코트 복귀로 닉스 동료들은 우승에 대한 갈망이 불타올랐고 가드 월트 프레이지어는 36득점으로 28점으로 맞선 웨스트의 레이커스를 113-99로 누르고 구단의 첫 우승을 거머 쥐었다. 1970년 5월8일 리드의 메디슨 스퀘어가든 스토리가 왜 전설이 되고 스포츠에서 정신력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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