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황혜정기자] 중계화면에 잡힌 프로야구 감독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다. 팔짱을 끼고 무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본다. 이따금 좋은 플레이를 펼친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감독이 있다. 다른 감독들처럼 박수로 선수단을 격려하기도 하지만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모습이 더 많이 잡힌다. 매 경기 더그아웃에서 ‘비밀노트’를 쓰는 키움히어로즈 홍원기(50) 감독의 이야기다.
홍 감독은 “메모장엔 시합 중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적는다. 다음 경기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전날 경기를 복기할 수 있고, 라인업을 짜는데 참고도 된다”라고 설명했다.
홍 감독이 자신의 메모장에 적는 내용은 예를 들어 이런 플레이들이다. 지난 20일 키움은 KIA에 2-3으로 패했는데 이날 키움은 1회말 아웃카운트 2개를 먼저 잡고도 수비 실책으로 주자를 내보내며 KIA에 선취점을 내줬다.
홍 감독은 “당시 수비 실책이 없었다면 선취점을 안 내줬을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적는다”고 밝혔다. 물론 KBO 공식 기록원이 기록하는 ‘공식 기록지’에 실책 상황이 표기돼 있지만, 홍 감독은 직접 기록한 ‘비밀노트’를 바탕으로 경기 후 해당 부분을 복기해나간다.
경기 중 선수들의 좋았던 모습도 적는다. 야수들의 호수비나 아쉽게 잡혔지만 좋았던 타구들도 적는다. 20일 KIA전에서 7회초 2사 1,2루에서 에디슨 러셀의 타구질이 좋았지만 상대 호수비에 라인드라이브로 잡혔다. 홍 감독은 이런 상황들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적어놓은 것을 근거로 선수를 판단하고자 함은 아니다. 선수들의 좋았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활용해 선수 성장에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사소하게는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방문한 횟수도 기록한다. 홍 감독은 “투수 코치 마운드 방문 횟수는 코치들도 따로 체크하지만 나도 적어놓으면 다음 상황을 결정하는데 쉽고 빠르다”고 했다.
홍 감독은 2009년 히어로즈에서 1군 수비 코치를 맡아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수비 코치로 출발해서인지 ‘비밀노트’에는 수비에 관한 사항이 주로 적힌다고 한다.
기록하는 습관은 코치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 삼색 볼펜과 자신만의 기호로 경기 중 발생하는 여러 상황을 구별화해 기호화해나간다. 2021년 1월 키움 감독으로 부임한 홍 감독은 여전히 기록하는 습관을 이어가고 있다.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이렇게 매번 직접 적어놓는 게 편해요.”
홍원기 감독만의 경기를 치르는 방식이다. 홍 감독은 1996년 한화이글스 1차 지명으로 프로 무대를 밟은 뒤 선수로서 1043경기에 나섰다. 코치·감독 경험까지 합하면 3000경기를 넘게 치렀다. 숱한 경험을 거쳐 깨달은 게 있다고 했다. 정말 사소한 부분이 경기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우리 선수가 던진 공을 심판이 스트라이크로 잡아줘야 하는 공을 볼로 잡아줘서 이닝을 마치지 못했어요. 결국 다음 공에 끝내기 홈런을 맞는 경우가 있었죠. 작은 것이 모여 경기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항상 느낍니다. 저는 그런 부분을 적어요.”
지난해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끈 감독은 기록지에 등장하지 않는 세밀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기록해 팀을 이끄는 데 활용한다. 결국 승패를 가르는 건 작은 부분이기에 홍원기 감독은 손으로 써 내려감으로써 머리로 기억하고 마음으로 새긴다. et16@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