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 중학교 2학년이던 15세부터 44세가 될 때까지. 사내는 30년간 잡았던 드럼 스틱을 놓았다. 대신 베이스를 연주하며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명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서고, 3000~40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던 과거도 지웠다. 대신 갓 스무살이던 1999년, 처음 찾아갔던 인디밴드의 고향 홍대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최근 24년간 활동한 밴드에서 탈퇴한 넬의 전 드러머 정재원의 이야기다.

팬들은 지난 3월 넬의 소속사 스페이스보헤미안이 “정재원이 일신상의 이유로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라고 밝혔을 때부터 3개월간 그의 복귀를 기다렸다.

정재원이 자신의 개인 채널을 통해 새로운 밴드의 결성을 알리고, 스페이스보헤미안이 그의 탈퇴를 기정사실화하자 단단했던 팬덤은 분열했다. 멤버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였고, 밴드 결성 뒤 단 한 번도 멤버가 교체되거나 탈퇴한 적이 없는 팀이라 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근 서울 광진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원은 “저 퇴사했습니다”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스페이스보헤미안은 넬 멤버들이 설립한 독립 레이블로 멤버 전원이 사내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무엇보다 그동안 응원해준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커서 인터뷰에 응했다”라고 강조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넬 드러머로 살아온 그가 새 출발을 결심한 건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팬데믹 기간, 심적으로 힘들 때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됐다”라고 말했다.

“뮤지션으로 열심히 활동했지만 아쉬움이 컸어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곡을 써보기 시작하며 곡 쓰는데 재미를 붙였어요.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려줄 날이 올 것이라 여겼죠.”

정재원이 원래 추구했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디스토피아적 느낌이 강한 넬의 음악과는 방향이 다른 펑크 얼터너티브록 장르에 가깝다. 그는 “어릴 때부터 펑크를 좋아했는데 직접 곡을 써보니 펑크 장르 곡이 대부분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넬 활동과 개인 활동을 병행하는 부분에 있어 팀과 의견이 엇갈렸다. 정재원은 “내 음악을 하는 시기를 조절할 수 있을까 싶었다”라며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넬이라는 명성도, 현실적인 금전 문제도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붙잡지 못했다.

회사와 정재원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팬들의 오해를 사는 일도 발생했다. 정재원은 “3월, 첫 공지가 나갔을 때 나는 이미 탈퇴했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멘탈이 무너졌다.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고민하고 방황하던 시기라 인터넷 커뮤니티도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라며 “하지만 팬들은 내가 탈퇴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나만 탈퇴라고 여겼다”라고 털어놓았다.

공지 뒤 3개월 동안 그는 새로운 팀 스트레이터스를 결성했다. 첫 클럽 공연을 앞두고 스페이스보헤미안 측에서 ‘정식 탈퇴 공지를 올리겠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다시금 멘탈이 무너졌다.

팬들은 정재원에게 “인사도 없이 새로운 팀 홍보에만 집중하고 있다”라고 무섭게 질책했다. 평소 말주변이 없던 그가 자신의 개인 채널에 짧은 인사말을 남긴 것에 대해서도 질타가 쏟아졌다. 정재원은 “말주변이 없어 글쓰기가 힘들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나와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밴드 스트레이터스는 드러머 이재혁과 기타리스트 유건희와 의기투합했다. 모델 출신인 유건희는 출중한 외모가 인상적이다. 정재원은 “두 사람이 각각 기타와 드럼을 맡다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베이스를 치게 됐다”라며 “세 사람이 추구하는 음악적 방향이 비슷하다. 건희는 LA메탈과 글램록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공통분모가 있어 재미있게 활동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스트레이터스는 최근 홍대 클럽 벤더와 FF에서 두 차례에 걸쳐 공연을 가졌다. 정재원은 “그간 너무 좋은 환경에서 음악하다 다시 홍대에 가니 또 멘탈이 붕괴됐다”라며 “밴드계의 대기업에 다니다 아직 메이저 기운이 안 빠진 상태”라고 웃었다.

홍대 클럽을 택한 건 데뷔 초 경험했던 인디밴드 특유의 독립적이면서도 날것의 기운을 느끼기 위함이다. 그는 “스무살 때는 홍대에서 공연하면서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더 많은 곡을 들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초심으로 돌아가 길게 앞날을 보려 한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스트레이터스란 팀명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팀원들의 의중을 담았다. 아마추어 복서 출신인 유건희의 주무기가 스트레이트인 것도 한 몫했다. 정재원은 “내가 생각했던 걸 음악으로 연주하고 부를 때 희열을 느꼈다. 솔직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다”라고 설명했다.

드러머로 활동도 계속된다. 주변에서 레코딩 세션을 부탁하기도 하고, 드럼 개인 레슨도 계속하고 있다. 정재원은 “다른 악기도 재밌지만 드럼이 가장 재미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악기”라며 “기회가 되면 드럼 솔로 독주도 하고 싶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24년간 변함없이 자신을 응원하며 지지해준 팬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그동안 정말 행복하고 고마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계속 넬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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