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예나 지금이나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것들은 어디나 있었다. 전쟁 직후 전남 목포 불량패 창호(오대환 분)도 그런 놈이다. 정년(김태리 분)이가 생선을 파는 시장에 들어와 자릿세를 요구했다. 말을 듣지 않자 물건을 패대기쳤다. 아수라장이 된 순간, 정년은 기지를 발휘했다. 어깨너머로 들은 소리를 열창한 것. 그리곤 “소리를 들었으면 소리값을 내라”며 불량배를 몰아붙였다. 창호는 슬그머니 뒤로 내뺐다. 이 광경을 매란 국극의 스타 문옥경(정은채 분)이 지켜봤다. 두 소리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됐다.

회당 20억원으로 방송사 드라마 제작비로는 최고 수준의 tvN ‘정년이’가 지난 12일 베일을 벗었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아우르는 ‘정년이’는 여성 국극단에 입단한 정년의 성장을 다룬다. 여성에게 인권이 없었던 시기, 편견과 보수적인 사회상을 이겨낸 국극단 소리꾼들의 열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특히 먹을 없이 힘든 당시의 배경이 경제가 파탄난 2024년의 대한민국과 닮았다. 명분과 의미보다 실리로 국극단에 접근하는 정년이의 태도도 십분 이해된다.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인물의 심리에 공감한다. 몰입은 시간문제다.

첫 회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다. 검은 때가 잔뜩 묻은 의상과 분장을 비롯해 바닷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시청자를 단숨에 1950년대로 이끌었다. 먹을 것이 없어 생존하기도 버거웠던 시대상을 그려내는 한편, 국극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매란의 왕자’라고 불리는 문옥경이 서혜랑(김윤혜 분)과 함께 펼친 무대는 강렬하면서도 새로웠다.

타이틀롤 김태리는 특유의 활기찬 이미지로 이야기를 주도했다. 소리를 하는 딸이 걱정돼 심히 다그치는 엄마 용례(문소리 분)에겐 찍소리도 못하는 딸이면서, 국극이 돈이 된다는 말을 듣자 적극성을 보이는 대목은 여느 1020과 닮았다. 슈퍼스타 옥경 앞에서도 당당하고, 자신이 못하는 부분에 있어선 정확히 인정할 줄도 아는 모습은 건강하다.

정은채는 멋있다. 남자로 보일 만큼 짧게 머리를 친 옥경을 단단하게 그려냈다. 자신의 영역에 있어서는 책임감이 있으며,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과 타인을 존중하는 배려도 있다. 어떤 기자로부터 아편을 투약했다는 의혹을 받는 위기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내비치는가 하면 억울한 상황에서도 자기 일을 꿋꿋이 하는 내면은 상당히 어른스럽다. ‘정년이’의 히로인으로 여겨진다. 정은채는 문옥경의 멋을 훌륭히 표현했다.

이제 겨우 출발했음에도, 속도감이 있다. 사건이 빠르게 발생하면서도 감정도 적잖이 넘실댄다. 워낙 관심이 많았던 작품이었던 덕에 스타트가 좋다. 1회 시청률은 닐슨코리아 수도권 가구 기준 평균 5.7%, 최고 6.8%, 전국 기준 평균 4.8%, 최고 5.9%다. 믿고 보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함과 동시에 신선하고 독특한 소재,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현재 주류로 떠오른 여성 서사의 시너지를 일으킬 전망이다. 또 하나의 신드롬 탄생을 예고한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