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정다워 기자] 그는 ‘동수저’ 출신이다.
한국 축구에는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2002 한일월드컵 멤버는 ‘다이아몬드 수저’로 통한다. 어딜 가든 대접받고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축구는 ‘2002 노래’를 부른다.
국가대표 출신 스타 플레이어였다면 ‘금수저’ 정도가 된다.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어도 K리그에서 꽤 유명했던 선수라면 ‘은수저’로 지칭할 수 있다.
광주FC 이정효 감독 정도면 ‘동수저’로 보는 게 적절하다. K리그에서 꼬박 10시즌간 200경기 이상 뛰었지만 현역 시절 인터뷰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혹은 무명에 가까운 선수 출신이다. ‘흙수저’까지는 아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배경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이 감독도 과거 자신을 동수저로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동수저 축구인이 K리그1 감독이 될 확률은 매우 낮다. K리그에서는 감독으로서의 역량, 잠재력보다 이름값에 주목한다. 최근 몇 년 사이 기류가 달라지고 있지만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감독 역시 K리그2의 광주에서 사령탑 생활을 시작했다. 전남 드래곤즈, 성남FC,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착실하게 지도자로 성장한 그는 1년 차에 곧바로 성과를 냈다. 광주의 K리그2 우승, 다이렉트 승격을 이끌었다.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2023년 K리그1 3위 등극, 지난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돌풍으로 브레이크 없이 성과를 내며 차기 ‘명장’ 후보 1순위로 성장했다.
지난해 겨울 이 감독은 마음이 흔들렸다. 전북 현대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 어떤 감독이라도 ‘혹할 만한’ 빅클럽이 전북이다. 이 감독 역시 다르지 않았지만 전북의 선택은 외국인 사령탑이었다. 이 감독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정호연, 허율, 이희균 등 주축이 떠나는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축구를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결국 그는 K리그에서 유일하게 ACLE 8강에 진출하며 능력을 또다시 입증했다. 실력이 상향평준화된 아시아 무대의 흐름을 고려할 때 괄목할 만한 성과다. 울산HD, 포항 스틸러스가 리그 스테이지에서 탈락해 더 돋보인다. 심지어 광주는 8강 2차전에서 J리그 챔피언 빗셀 고베를 내용에서 압도했다. 3-0이라는 스코어는 결과물일 뿐이다. 현재 고베를 이 정도로 누를 수 있는 팀은 K리그에 없다.


동수저 출신인 자신을 향한 의심, 혹은 질투를 뒤로하고 이 감독은 앞만 보고 달렸다. 승격 첫 시즌이었던 2023년 이 감독은 FC서울을 향해 “저렇게 축구 하는 팀에 패해 분하다”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정제되지 않은, 다소 노골적인 발언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 감독은 폭주 기관차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감독도 다듬어졌다. 상대를 향한 존중, 예의를 갖춘 지도자로 변모했다. 원정팀 서포터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선수들에게 상대 팀 엠블럼을 밟지 말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트렌디한 스타일을 제외한 외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오직 축구로만 승부하고 인정받는 단계에 도달했다.
스타 플레이어가 당연하게 누리는 호사 없이, 이 감독은 스스로 한국 축구의 자산, 보물이 됐다. 현재 한국에서 이 감독 정도로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는 찾기 어렵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은 광주에서 이 정도 성과를 냈으니 이 감독의 역량은 누구나 인정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말로 이 감독을 의심하던 눈초리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여전히 누군가는 ‘빅클럽에서 해봐야 안다’라며 공허한 시샘을 보내겠지만, 능력 있는 지도자 기근에 시달리는 한국 축구에서 이 감독은 의심의 여지 없이 특출난 존재가 됐다.
이 감독는 ACLE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서아시아 클럽의 ‘탈아시아급’ 지도자들과 지략 대결을 벌인다. 알 아흘리의 마티야스 야이슬레(독일), 알 힐랄의 조르헤 제수스(포르투갈), 알 나스르의 스테파노 피올리(이탈리아) 등 중 한 명과 맞대결을 벌이게 된다. 야이슬레 감독은 오스트리아 최강 레드불 잘츠부르크 사령탑 출신이다. 해외 축구 무대에서 익숙한 제수스 감독은 포르투갈 리그 최고의 지도자였다. 피올리 감독은 이탈리아 세리에A 명문 AC밀란에서 우승을 경험한 명장이다. 싸우는 상대의 수준이 달라진다.
쓰는 돈의 규모가 다른 광주가 이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이 감독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K리그를 넘어 아시아 전역에서 인정받는 지도자가 된다는 의미다. weo@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