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시작은 2009년 뉴욕의 길거리였다. 인기 절정이었던 걸그룹 원더걸스가 낯선 미국 땅에서 전단지를 돌렸다. “노래 한 번만 들어주세요”라며 CD를 건넸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그 고통의 시간은 팀을 흔드는 계기가 됐으나, 작금의 K팝 위상을 높인 밀알이 됐다. 이젠 전단지를 돌릴 필요도 굽신 거릴 이유도 없다. K팝은 콧대 높은 그래미가 빼놓을 수 없는 ‘VIP’다.
제68회 그래미 어워즈에 로제가 퍼포머로, 캣츠아이가 신인상 후보로 입성했다.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 팀은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를 수상했다.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OST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의 작곡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변방의 작은 나라가 팝의 본토를 점령하기 위해 흘렸던 20년의 ‘피, 땀, 눈물’이 서려 있다. 2000년대 중반 비, 보아, 원더걸스 등은 낯선 타지에서 현지 인프라 없이 발로 뛰며 인종차별과 무관심을 견뎠다. 비록 큰 성과는 없었으나, K팝의 씨앗을 뿌린 시기다.
그리고 2012년 기적이 발생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치밀한 전략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당시 미국에선 싸이를 ‘B급 코미디’로 소비했지만,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강남스타일’은 유튜브와 음원 다운로드를 중심으로 빌보드 메인 차트 ‘핫 100’에서 7주 연속 2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유튜브 최초 조회수 10억 뷰도 돌파했다. 오롯이 한국어 가사였음에도 빌보드에 오르며 고정관념을 부쉈다.

바통을 방탄소년단(BTS)이 받았다. 방탄소년단은 뉴미디어인 SNS와 유튜브로 팬들을 섭렵했다. 2018년 정규 3집 ‘러브 유어셀프 전 티어(LOVE YOURSELF 轉 Tear)’로 K팝 사상 최초 ‘빌보드 200’ 1위에 올랐으며, 2020년에는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꿈의 차트인 ‘핫 100’ 정상을 밟았다.
광폭 행보는 이어졌다. ‘새비지 러브(Savage Love)’ ‘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 ‘버터(Butter)’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마이 유니버스(My Universe)’까지 총 6곡을 ‘핫 100’ 1위에 올려놓으며 비틀즈 이래 최단기간 기록을 갈아치웠다. K팝이 단순한 하위문화를 넘어 하나의 글로벌 팝으로 우뚝 선 순간이다.

그럼에도 유리천장이 있었다. 음악사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음에도 그래미는 방탄소년단을 홀대했다.제너럴 필즈(올해의 노래·올해의 레코드·올해의 앨범·신인상)에는 배제한 채 시청률을 위해 마지막까지 행사장에 남겨뒀다. 보수적인 그래미의 부끄러운 민낯을 본 셈이다.
2026년, 로제와 캣츠아이를 보면 K팝은 더 이상 ‘이방인의 음악’이 아니다. 한국의 술자리 게임에서 착안한 로제의 ‘아파트(APT.)’가 그래미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고, ‘K팝 시스템’으로 육성된 다국적 그룹 캣츠아이가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 ‘골든(Golden)’은 희망적인 코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개인기나 우연한 히트곡이 아니라 K팝이란 장르가 팝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임진모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의 꽃길은 선배들이 황무지를 다진 결과”라며 “로제와 캣츠아이의 그래미 입성은 K팝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평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