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서지현 기자] ‘윙크보이’로 불리며 국민 프로듀서들의 선택을 기다리던 소년은 어느새 역사 속 인물의 고독까지 품어낼 줄 아는 배우가 됐다. 빠르게 흘러간 박지훈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서사로 ‘저장’ 됐다.

박지훈은 4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에서 단종 이홍위를 연기했다. ‘왕사남’은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마을의 부흥을 위해 스스로 유배지를 선택한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와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선왕 이홍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박지훈이 그려낸 이홍위는 비극적인 운명을 침묵과 눈빛으로 완성해가는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권력 다툼 속에서 밀려난 비운의 군주이지만 연약한 피해자로만 그려지진 않는다. 박지훈은 억눌린 분노와 체념,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눈빛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아 올린다. 핏발 선 눈으로 유지태와 맞서는 장면에선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강렬하다.

개봉 전부터 기대감으로 채워진 ‘왕사남’답게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4일 개봉날 기준 11만7791명이 선택하며 누적 14만7546명을 기록, 새로운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다.

이처럼 메마르고 피폐한 얼굴로 스크린을 채운 박지훈의 모습은 신선하다. 한때 박지훈은 무대 위에서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시선을 사로잡던 그룹 워너원의 멤버였다. 대중에게 ‘박지훈’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출발점은 2017년 방송된 엠넷 ‘프로듀스 101’ 시즌2였다.

아이돌 연습생이었던 박지훈은 ‘윙크 애교’와 함께 “내 마음속에 저장”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최종 2위를 차지한 뒤 그룹 워너원으로 데뷔했고, 그 시절의 박지훈은 늘 웃는 얼굴과 밝은 이미지의 대명사였다.

그러면서도 연기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아역 배우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박지훈은 가수 활동과 병행하며 드라마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 ‘연애혁명’ ‘멀리서 보면 푸른 봄’ 등을 통해 필모그래피를 차근차근 쌓아갔다.

전환점은 ‘약한 영웅 Class 1’이었다. 박지훈은 연시은 역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꺼내 들었다. 불완전한 10대의 감정과 폭력, 우정의 상실 속에서 무너져가는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특히 대사가 많지 않은 인물을 오롯이 눈빛으로 완성해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고, 여기에 액션 연기까지 더해지며 ‘배우 박지훈’이라는 이름을 단숨에 각인시켰다.

덕분에 연시은은 박지훈의 배우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리고 ‘왕사남’을 통해 또 하나의 영역을 구축했다. 공교롭게도 연시은과 이홍위는 모두 말보다 눈빛으로 말하는 인물들이다. 박지훈은 앞선 인터뷰에서 자신의 강점으로 ‘눈빛’을 꼽은 바 있다. 슬픔과 분노, 기쁨과 애절함까지 감정의 스펙트럼을 눈빛 하나로 설득해내는 힘이 그의 가장 큰 무기다.

이어 ‘왕사남’을 통해 박지훈은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수식어를 넘어 시대극과 실존 인물까지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윙크 한 번으로 대중의 마음을 ‘저장’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인물의 감정과 시간을 고스란히 저장해 관객에게 건네는 배우가 됐다. sjay0928@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