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한때 ‘아이돌 출신’이라는 말은 연기력 논란의 다른 이름이었다. 무대 위에서 증명한 스타성과 달리, 카메라 앞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감정과 흔들리는 호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기와 화제성만 앞세운 캐스팅이라는 인식도 따라붙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다르다. 최근 드라마와 OTT 속 아이돌 출신 배우들은 더 이상 ‘검증 대상’이 아니다.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기능하며, 캐릭터의 중심을 맡는다.

아이돌 준비 과정이 이전과 달라진 덕분이다. 요즘 연습생 시스템은 무대 중심에서 영상 중심으로 옮겨갔다. 데뷔 전부터 카메라 연기, 발성, 감정 분화 훈련이 기본이다. 오디션용 대본 리딩과 장면 분석도 일상화됐다. 노래와 춤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운 환경인 탓이다. 연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제작 현장의 기준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팬덤 규모와 화제성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화면에서 드러나는 연기력이 곧바로 성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중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콘텐츠 소모 속도도 더 가파르다. 연기력이 부족하면 작품 전체가 즉각 흔들린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요즘 시청자는 바로 알아본다. 감정이 가짜면 그 순간 이탈한다. 화제성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아이돌 출신에서 배우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은 제국의아이들 출신 임시완이다. 임시완은 영화 ‘비상선언’, ‘1947 보스톤’을 거치며 인물의 불안과 집착을 과장 없이 축적했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표정과 호흡으로 전하는 방식이 임시완의 강점이다.

워너원과 뉴이스트에 소속된 황민현은 티빙 ‘스터디그룹’에서 피지컬 액션과 코미디 리듬을 결합했다. 과장될 수 있는 설정을 순진한 태도로 눌러내며 캐릭터의 설득력을 확보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컴백한 박지훈도 워너원 출신이다. 넷플릭스 ‘약한영웅’ 시리즈에서 말보다 침묵이 많은 인물을 선택했다. 대사가 적은 대신 시선과 긴장으로 서사를 밀어붙였다. 박지훈 특유의 절제된 감정 운용이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아이즈원 출신 조유리는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시즌2에서 극한 상황에 놓인 인물의 공포와 결단을 단계적으로 쌓았다.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눌러 담는 기법으로 장면의 무게를 만들었다.

트와이스 멤버 다현은 JTBC ‘러브 미’에서 일상에 가까운 청춘 캐릭터를 통해 안정감을 보여줬다. 과하지 않은 발성과 리듬으로 극의 온도를 유지하며 연기자로서의 첫 해를 무리 없이 넘겼다.

소녀시대 임윤아는 ‘폭군의 셰프’에서 타임슬립 판타지라는 복합 장르를 히트시키며 이제는 배우로서 완벽한 입지를 구축했다. 요리, 로맨스, 생존 서사를 균형 있게 끌고 가며 극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엑소 멤버 도경수는 ‘괜찮아, 사랑이야’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필모그래피를 확장해왔다. ‘백일의 낭군님’에서는 사극 톤에 맞는 발성과 감정 밀도로 흥행과 연기력을 동시에 입증했다.

구구단 출신 김세정도 빼놓을 수 없다.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에서 강단과 온기를 동시에 지닌 인물을 구축하며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다.

이제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수식어는 설명이 아니라 이력에 가깝다. 중요한 건 출신이 아니라, 화면 안에서 무엇을 남기느냐다. 안방극장의 연기돌들이 과거의 선입견을 실력으로 바꿔놓았다. khd9987@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