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배우를 두고 하얀 도화지라고 한다. 감독의 연출에 따라, 시나리오 속 문장에 따라 인간 군상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게 배우란 직업이 가진 숙명이어서다.

대부분 다양성을 추구하겠지만, 모두가 하얀 도화지가 되진 못한다. 기술적으로 부족한 점도 있고,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도 워낙 색이 뚜렷한 경우 한계를 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고착화된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잘 어울리는 범주에만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이이담은 최근 가장 눈에 띄는 하얀 도화지다. 선과 악은 물론 귀(貴)와 천(賤)도 넘나든다. 도회적인 커리어 우먼 룩에 명품을 이리저리 걸쳐도 어울리고, 시장통에 굴러다니는 무채색의 값싼 옷도 제 옷처럼 몸에 딱 붙인다.

비록 가난하지만 스마트하고 똑 부러진 미술관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공작도시’를 시작으로, 차분한 톤을 갖고 누구보다 단단하게 환자들을 대했던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이하 ‘정신아’)의 정신과 간호사를 지나, 최고 권력을 노린 이기적인 후궁으로 분한 ‘원경’까지 완벽히 소화했다.

‘공작도시’에선 매우 똑똑하다 못해 할 말을 송곳처럼 꽂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 ‘정신아’에선 변덕스러운 면이 있으나 떳떳함을 잃지 않는 강인함이 돋보였다. ‘원경’에서는 겉으로 선한 척하다 뒤로는 자기 욕망의 덫에 스스로 걸리는 모습마저 자연스럽게 그려냈다.

최근에도 스펙트럼의 확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방송국 PD 역을 맡은 ‘이 사랑 통역 되나요?’로 당당한 매력을 펼쳤고, 시장의 옷 수선 기술자에서 진짜 명품을 탐하는 20대 여성으로 변모한 ‘레이디 두아’로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순박한 척하다 가짜 명예에 취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죄를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뻔뻔함을 정확히 묘사했다. 나아가 ‘파반느’에선 약자를 확실히 멸시하는 되바라진 명품족으로 나서 빌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마치 연애 예능 프로그램에 뒤늦게 등장해 판을 뒤흔드는 ‘메기녀’와 닮았다. 이이담이 등장하면 극의 공기가 싹 바뀐다. 선인지 악인지 쉽게 구분이 안 간다. 좋은 사람인 듯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뒤통수를 치기도 하고, 나쁜 말을 뱉다가도 결과적으로는 옳은 길을 가기도 한다. 여유로운 태도 속에 서슬 퍼런 칼날이 숨어 있다.

어린 나이에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진폭을 묵직하게 발산한다. 특유의 아우라도 훌륭하지만, 인물이 가진 감성을 정확히 짚어내는 집중력과 발성, 발음 등 기술적 기본기 역시 탁탄하다. 요즘 잘되는 작품에 꼭 이이담이 보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누구보다 아름답게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독보적인 신스틸러다. 한동안 작품 제안이 없어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는 이이담. 좋은 연기력을 넘어 어디든 딱 붙어버리는 인물을 만들어버리는 덕에 그의 운신의 폭은 더욱 넓어질 수밖에 없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