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유시민 작가가 일으킨 통찰의 파열음이 크고도 길다. 벌써 수주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가 제시한 ‘ABC론’의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상의 본질을 경계하자는 취지에서 꺼낸 직관적인 비유일 뿐인데, 마치 지뢰밭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곳곳에서 제 발 저린 비명들이 터져 나온다.
유 작가가 밝힌 ‘ABC론’의 배경은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이른바 그를 지지하는 ‘뉴이재명’의 현상에서 비롯된다. ‘뉴이재명’ 현상을 무기로 앞세워 ‘친명’과 ‘반명’ 갈라치기를 하는 집단적 조짐이 보이자 경계하자는 측면에서 나왔다.
ABC론의 핵심은 간단명료하다. 정치적 군상을 가치 중심(A), 이익 중심(B), 그리고 이 둘의 균형(C)으로 나누었을 때, 작금의 정치판에는 이익을 좇는 B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진단이다. 최근 드러난 ‘뉴이재명’ 현상에서 비롯된 정치적 발언들도 역사적으로 미뤄봤을 때 B집단의 행위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특정 개인을 향한 맹비난이 아니라, 권력의 향방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치권 생태계를 향한 거시적 일갈이다. 스스로 ‘나는 정치인으로서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가’ 냉정히 돌아보면 될 일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비껴난 지 10년이 넘은 논객의 쓴소리에 정치권은 기형적으로 반응했다. 텍스트의 본질은 외면한 채 “왜 국민 갈라치기를 하느냐” “친문 부활을 위한 수작이다”라며 핏대를 세우는 무리들이 속출했다. 인류애나 시대적 가치를 깊이 고뇌해 본 적 없이, 오직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온 자들의 빈약한 사고회로가 투명하게 엿보인다.

이 우스꽝스러운 소동은 연예계의 한 사건과 정확히 포개어진다. 바로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어느새 힙합은 안 멋져’ 사태다. 지난 2021년 Mnet ‘쇼미더머니 10’ 무대에 오른 그는 돈과 과시욕으로 점철된 채 철학이 지워진 한국 힙합씬을 향해 “이건 하나의 유행, TV쇼”라며 묵직한 돌직구를 던졌다. 진정한 멋은 얄팍한 돈자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 자유에 있다는 예술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이찬혁의 예술적 통찰에 돌아온 래퍼들의 반응은 ‘ABC론’이 일으킨 굉음과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뤘다. 행간의 의미를 곱씹는 대신, 알량한 자존심이 긁힌 래퍼들은 너도나도 “이래도 힙합이 안 멋지냐”며 맥락 없는 디스곡을 쏟아냈다. 4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섀도우 복싱을 하는 저격 랩이 등장하는가 하면, 한 힙합 레이블의 수장은 방송에서 이찬혁에게 “이제 힙합과 화해하시죠”라며 논점을 흩트리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달을 가리켰더니 손가락을 물어뜯는 형국이다. 부끄러움은 현자의 몫이다.
파리떼처럼 몰려든 정치인들과 래퍼들이 만들어낸 기이한 소동의 기저에는 ‘철학의 빈곤’이 존재한다. 스스로를 지탱할 확고한 철학과 윤리적 잣대가 없으니, 뼈아픈 진실을 마주할 용기도 비판을 수용할 그릇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곡해하고 메신저를 헐뜯는 유치한 앙탈로 스스로의 밑바닥을 증명한 셈이다.
“인간은 어리석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자조적인 밈(Meme)은 2026년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 철학이 거세된 자들의 요란한 합창은 여의도 정치판이나 무대 위 힙합씬이나 똑같이 멋지지 않다. 거울을 깬다고 자신의 추악한 민낯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걸 돌아볼 필요가 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