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 달라졌다.

더는 사랑받기 위해 오래 참고 버티지 않는다. 선하고, 이해하고, 상대를 변화시키는 역할에 머물지도 않는다. 최근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결핍을 말하고, 목표를 향해 먼저 움직인다. 사랑도 삶을 구원하는 결말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충돌하며 발생하는 사건으로 그려진다.

MBC 금토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의 성희주가 이 흐름을 잘 보여준다. 아이유가 연기하는 성희주는 미모와 능력, 재력까지 갖춘 캐슬뷰티 대표다. 그러나 그는 평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매일 마주한다. 자신에게 없는 단 하나의 조건을 얻기 위해 이안대군과 계약 결혼을 선택하며 극을 이끈다.

성희주는 과거 로코 여주와 결이 다르다. 그는 결핍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결핍을 동력으로 삼는다. 사랑을 기다리는 대신 거래를 선택하고,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21세기 대군부인’은 익숙한 신분차 로맨스를 새롭게 비튼다. 여성 인물이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서사를 움직이는 주체로 선다.

이런 변화는 한 작품에만 머물지 않는다. 넷플릭스 ‘다 이루어질지니’의 기가영도 비슷한 흐름 위에 있다. 수지가 연기한 기가영은 감정이 결여된 인물로, 천여 년 만에 깨어난 램프의 정령 지니와 세 가지 소원을 두고 얽힌다. 작품은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 형식을 취하지만, 중심에는 감정을 결핍한 여성 캐릭터가 놓인다.

티빙 오리지널 ‘친애하는 X’의 백아진은 더 날카로운 사례다. 김유정이 연기한 백아진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딛고 정상에 오르기 위해 완벽한 가면을 쓰는 톱 여배우다. 성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며, 서사는 그의 추락과 복수로 전개된다. 기존 드라마가 여성 인물에게 도덕적 선명성을 요구했다면, ‘친애하는 X’는 욕망과 악의, 생존 본능을 한 인물 안에 밀어 넣었다.

디즈니+ ‘하이퍼나이프’의 정세옥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박은빈이 연기한 정세옥은 과거 촉망받는 천재 의사였지만,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스승과 재회하며 치열하게 맞서는 인물이다. 그는 뇌수술에 집착하는 천재 의사이자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지닌 캐릭터로 소개됐다. 박은빈은 그를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인물로 접근했고, 기존 이미지와 다른 강한 얼굴을 보여줬다.

이런 캐릭터가 인기를 얻는 배경에는 시청 방식의 변화도 있다. 최근 드라마 팬들은 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따라가며 보는 ‘해석형 소비’에 익숙하다. 완전히 선하거나 악한 인물보다 결함이 뚜렷한 인물이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든다. 행동의 동기가 쉽게 읽히지 않을수록 반응은 커진다.

한 방송 관계자는 “최근 시청자들은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결핍이 선택을 만들었는지 추적하며 본다. 완전한 선역이나 악역보다 모순이 있는 인물이 온라인에서 더 많은 해석을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SNS에서는 캐릭터 분석이 콘텐츠가 된다. 인물의 결핍과 욕망이 분명할수록 장면 하나, 대사 하나가 다시 소비된다”고 짚었다.

실제로 최근 드라마의 화제성은 본방에서 끝나지 않는다. 방송 직후 SNS와 커뮤니티에는 캐릭터의 선택을 분석하는 글이 올라온다. 인물의 불완전함은 약점이 아니라 확산의 재료가 된다. 드라마는 시청자의 해석을 거치며 다시 살아난다.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졌다. 과거 여성 인물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됐다. 착하고, 참고, 이해하는 인물이 사랑받기 쉬웠다. 욕망이 큰 여성은 종종 악역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최근 작품들은 여성 캐릭터에게도 욕망과 분노, 광기와 폭력성을 허용한다. 여성 인물이 반드시 선해야 한다는 규칙이 느슨해진 셈이다.

새로운 경향의 여성 캐릭터들이 드라마의 중심에 서고 있다. 이들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흔들리기 때문에 이야기가 생긴다. 한국 드라마는 지금 새로운 여성 페르소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khd9987@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