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시작부터 정신사납다. 또 경박하다. 퍼포먼스이기 전에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듯 불안을 자극한다. 멜로디가 흐르고 시선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덧 아일릿의 몸짓에 흠뻑 빠지게 된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다. “‘잇츠 미(It’s Me)’는 한 번 먹으면 계속 먹게 되는 훠궈 같은 곡”이란 모카의 발언은 딱 맞아떨어지는 설명이다.
K팝 5세대 걸그룹 시장을 휩쓸던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의 잔잔한 물결 속으로, 통제 불능의 ‘도파민 폭탄’이 투하됐다. 그 파문의 중심에는 미니 4집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로 돌아온 아일릿(ILLIT)이 있다.
타이틀곡 ‘잇츠 미’를 내세운 아일릿의 행보는 그야말로 영리하고 도발적이다. 데뷔 초부터 구축해 온 발랄한 소녀의 감성은 유지하되, 음악은 폭발적인 테크노 장르로 뒤집어썼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일릿이 이끄는 새로운 현상이다. 아이브가 범접 불가한 자기애를, 에스파가 신격화된 AI를, 뉴진스가 닿을 수 없는 향수를 내세우며 4세대 걸그룹들이 완벽한 우상을 만들어냈다면, 아일릿은 팬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완벽함을 버리고 기꺼이 대중의 ‘밈(Meme)’이 되기를 자처하겠다는 태도다. “Who‘s your bias? I’m your bias!”(너의 최애는 누구야? 바로 나야!)를 반복해서 외치고, ‘답답넙치’ 같은 엉뚱한 조어를 남발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경외의 대상에서 네티즌들의 만만한 놀잇감으로, K팝 소비의 권력을 대중에게 넘겨버린 전략이다.
노래와 더불어 MV를 비롯한 각종 콘텐츠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무대 위 고삐 풀린 듯 널뛰는 이 날것의 감성이 K팝 최고의 자본력과 시스템 안에서 가장 치밀하게 세공된 ‘가짜 싼티’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비트와 퍼포먼스는 시청각을 정신 사납게 때리고, 정제된 우아함 대신 거대 자본을 들여 15초짜리 숏폼 특유의 조잡함을 모방해 낸 기획력은 거부할 수 없는 B급 쾌감을 안긴다.

아일릿의 가사도 시대를 앞서간다. 이지 리스닝 트렌드가 대중의 일상에 스며드는 배경음이 되려 했다면, 아일릿의 테크노는 음악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댓글창으로 만들었다. “너는 마치 loyal fan”, “가두지 마 보석함” 등 1020 세대의 노골적인 인정 욕구를 담은 가사들은 시적인 은유나 서사를 버린 채, 그저 알고리즘을 타고 네티즌들이 퍼다 나르기 좋은 자극적인 텍스트 조각들로 만들어졌다.
숏폼 시대가 낳은 영리한 진화인지, 대중의 입맛만을 노린 음악적 퇴행인지 기로에 서 있긴 하지만, 아일릿이 던진 쾌락은 대중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신보는 발매 첫 일주일 동안 41만 1654장이 팔리며 자체 초동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고, 일본 오리콘 ‘데일리 앨범 랭킹’ 정상까지 단숨에 석권했다. 국내 멜론 ‘톱 100’ 차트에서는 9위까지 수직 상승했다. 스포티파이 글로벌 ‘톱 송 데뷔’ 6위, 애플뮤직 글로벌 차트 진입 등 언어의 장벽을 허문 호성적을 이어가고 있다.

아일릿은 기존의 ‘귀여움’이라는 껍질을 스스로 깨부수고, 1020 세대의 과감한 자기표현 방식을 테크노 사운드에 실어 날렸다. 완벽한 우상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장 파급력 있는 ‘최애 밈’이 된 이 발칙한 마법 소녀들은 현재 K팝 신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 뚜렷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