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비극보다 예술가의 영혼에 무게

사랑보다 깊어진 ‘천재 음악가-뮤즈’의 우정

베토벤 명곡, 뮤지컬로 재탄생…‘박효신·홍광호 장르’의 전율

8월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신이 허락한 천재가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루트비히 반 베토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의 음악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며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전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클래식 음악사의 중심에 남을 그 이름, 21세기 대한민국의 천재 예술가들의 목소리로 재현한다.

뮤지컬 ‘베토벤’이 3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왔다.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길 메머트 연출 등 제작진이 “재연이 아닌 리론칭”을 선언했던 자신감은 허언이 아니었다. 작품 속 인물의 서사부터 원곡 선율을 활용한 새로운 넘버, 무대 구성까지 전면 교체했다.

이번 시즌은 초연의 박효신과 박시원 외 중심 배역들을 전면 교체했다. 재연도 역대급 캐스팅이다. ‘베토벤’ 역 홍광호와 ‘안토니 브렌타노’ 역 윤공주·김지현·김지우, ‘카스파 반 베토벤’ 역 신성민·김도현 등 국내 최정상급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 리론칭으로 되찾은 정체성…흥행작서 완성형으로 진화

‘베토벤’은 초연 당시 한국 창작 뮤지컬 역사에 돌풍을 일으키며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국보급 배우들과 화려한 무대를 앞세워 대중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작품의 정체성이 모호한 서사와 중심축을 잃은 전개 등으로 인해 작품성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이번 ‘리론칭 프로젝트’는 화려한 볼거리보다 이야기와 감정에 집중했다. 베토벤을 중심으로 각 인물의 서사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 단순한 재공연이 아닌 작품 자체를 새롭게 완성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러브 트라이앵글’ 구도의 재정비다. 단순한 삼각관계에 머물렀던 인물들의 관계를 베토벤을 중심으로 각 캐릭터의 감정과 서사에 맡겼다. 여기에 주변 인물들의 내면까지 꿰뚫어 극의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베토벤을 괴롭히던 혼령마저 그의 감정 세포로 바뀌었다.

이 같은 변화는 넘버의 가사와 무대 연출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전달한다.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담아낸 넘버는 감정선을 촘촘히 이어준다. 원근법을 적극 활용한 무대는 인물 간의 심리적 거리와 관계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특히 거대한 울림을 선사하는 1막과 2막의 피날레는 한마디로 “끝났다!”

◇ 금지된 사랑 대신 ‘가장 소중한 친구’로 리터칭

베토벤이 변했다. 초연에서 고독과 절망에 빠진 ‘외로운’ 인물이었다면, 이번 리론칭에서는 상처를 딛고 빛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보풀과 먼지로 가득할 것 같은 묵직한 검정 코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베토벤의 고집불통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권력과 부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예술가로서의 존엄과 자존심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작품은 인간성과 예술의 가치를 또렷하게 대비시킨다. 신은 베토벤에게 시대를 뛰어넘는 음악적 재능을 선물했지만, 세상은 그에게 고독과 시련을 안겼다. 반면,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들은 풍요를 누리지만, 천성의 천박함으로 벌했다. 가진 거 없는 자들은 거짓과 진실을 섞어 가장 좋은 안줏거리를 맛보지만, 특유의 시기와 질투로 밑바닥 인생을 살게 한다.

이 가운데 안토니는 유일하게 베토벤을 믿고 지지해준 존재다. 초연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금지된 사랑이었다면, 이번 시즌의 안토니는 베토벤의 음악에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이자 영혼의 친구로서 등장한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지독하게 이어지는 가난,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실감에 갇혀 있던 베토벤을 어둠에서 끄집어낸다.

베토벤은 사랑에 흔들리는 인물이 아닌, 예술가의 자존심과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는 인물로 완성했다. 안토니 역시 천재의 음악과 삶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며 예술적 영혼의 동반자가 된다. 이들 관계는 신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축복이자 기적인 ‘가장 소중한 친구’로서 승화했다.

◇ ‘환희의 송가’로 향하는 여정…박효신·홍광호가 완성한 다른 감동

모든 장면·넘버가 클라이막스 급이다. 작품은 ‘환희의 송가’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교향곡 9번 ‘합창(Choral)’ 등 베토벤의 대표 명곡을 현대적인 뮤지컬 넘버로 재탄생시켰다. 클래식과 뮤지컬의 경계를 허문 음악적 완성도 또한 작품의 강력한 경쟁력이다.

익숙한 클래식 선율은 무대 위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만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터뜨린다. 절망과 분노, 희망과 기쁨을 지나 마침내 환희로 장식한다.

극 중 반복되는 같은 선율이 매 순간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 같은 멜로디는 때론 절박한 절규가 되고, 또 다른 순간엔 분노를 토해내는 외침이 된다. 때론 사랑을 고백하는 속삭임으로, 희망을 향한 의지로 변주돼 극의 몰입도를 극강으로 끌어올린다.

하나의 넘버가 다양한 감정을 품을 수 있는 건 배우들의 압도적인 표현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박효신과 홍광호의 한 곡 한 곡 무대는 마치 영화 한 편을 쇼츠로 보는 듯하다.

‘베토벤’ 역 박효신과 홍광호는 배우를 넘어 하나의 장르다. 서로 다른 해석으로 각자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박효신은 극과 극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넘나들며 무대를 압도한다. 홍광호는 한 곡 안에서도 가사의 의미와 감정 변화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성대를 갈아 끼워 몰입감을 더한다.

베토벤의 명곡과 배우들의 폭발적인 연기,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사운드가 어우러지는 순간, 무대는 말 그대로 전율 그 자체가 된다.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눈 부신 빛을 만들어낸 불멸의 이야기 ‘베토벤’은 오는 8월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