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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이하 음저협) 제22대 회장에 선임된 작곡가 윤명선(47)은 ‘트로트 퀸’ 장윤정의 히트곡 ‘어머나’를 포함해 이승철의 ‘서쪽 하늘’, 이루의 ‘까만 안경’, 윤미래의 ‘떠나지마’, 슈퍼주니어의 ‘로꾸거’, 김장훈의 ‘허니’ 등을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무척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다. 경기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해군홍보단에서 군 복무를 한 후 가수, 매니저, 음반 제작자, 미술 큐레이터, 시인, 작사가, 작곡가 등 쉼 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왔다.
오는 20일부터는 ‘음저협’ 신임 회장으로서 4년 동안 협회를 이끌게 됐다. 그는 “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지리산 등반을 했다. 산을 오르면서 ‘내가 왜 협회 회장이 되려고 했는지’를 다시 생각해봤다. 1만 7000여 명 회원 가족을 위해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1964년 6월 설립된 비영리단체 한국음악저작권협회(KMCA·Korea Music Copyright Association)는 국내에서 저작권으로 보호받는 음악저작물을 위한 집중관리단체다. 음악저작권 신탁관리, 음악저작권에 관한 조사·연구 활동, 회원의 복지 향상을 위한 사업 등을 하고 있다.
-40대 나이에 음저협 회장은 처음인 것 같은데 선거에 뛰어든 이유가 뭡니까?
협회의 본질이 변질했다고 느꼈다. 작가 위주로 다시 협회를 돌려놓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예전에 협회 위주로 조직이 운영됐다면 이제부터는 예술가 위주로 가야만 건강한 협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1939년에 세워진 일본음악저작권협회 ‘자스락’(JASRAC)은 현재 회원들에게 엄청난 신뢰와 믿음을 받고 있다. 임기(4년) 내에 자스락에 못지않은 음저협, 가장 친절한 협회, 경쟁력 있는 협회로 만들 것이다. 회장으로서의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사심을 버리고 작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하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회를 바꿔 볼 작정인지요?
우선 취임 전에 협회장 임금을 30% 삭감한다고 선언했다. 취임 후 3개월쯤에는 협회의 회계 사항을 홈페이지에 오픈하겠다. 해외 출장시 비행기 좌석 등급도 기존에서 한 단계씩 낮추고 차량도 쓰던 차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모든 관례를 손질할 것이다. 사무총장 자리도 외부에서 영입하지 않고 협회 사상 처음으로 내부 직원에서 뽑을 거다. 얼마 전에는 서태지컴퍼니 측 사람을 만나서 그동안 서태지 씨가 뮤지션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받은 것에 사과하고, 이를 훼손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서태지는 2002년 음저협이 자신의 노래 ‘컴백홈’을 패러디한 가수의 음반을 승인하자 이에 반발, 협회에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음반에 대한 협회의 신탁관리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음저협이 가처분 결정 이후에도 계속 음원 사용료를 징수하자 저작권 사용료 반환 소송을 내 2013년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전체 회원 1만 7000여 명의 권익 보호와 협회의 재정적인 문제 등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저작권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예년과 달리 연말에 길거리에서 캐럴이 사라졌다. 저작권 문제 때문이다. 임기 내에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 또한, 저작권이 아주 미비한 중국 시장 등 세계 음악 시장에서 음저협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
-K팝의 미래에 대한 답은 뭐라고 보십니까?
실력 있는, 경쟁력 있는 작사가, 작곡가 양성이 모법 답일 거다. 아무리 유명한 호텔이라도 음식이 맛없으면 안 된다. 작사, 작곡가는 호텔 주방장 같은 존재라고 본다. K팝의 근본은 작품이다. K팝이 활성화했을 때를 보면 대부분 국내 작사, 작곡가의 작품이었다. 외국 곡을 받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좋은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예술을 위한 ‘문화 군사력’을 강화하고, 활동 영역을 더욱 넓혀야 할 때다. K팝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문화 군사력’이다. K팝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될 거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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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가수, 제작자, 작곡가 등 안 해본 업(業) 없는데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대전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6남매 중 막내였는데 어릴 적에 방황을 많이 했다. 가정환경이 불우해 거의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다시피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경기대 행정학과에 덜컥 합격했다. 대학 2학년 때 상금 타서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1987년 MBC 신인가요제에 나갔다. 당시 과 선배한테 기타를 잠시 빌려 이틀간 배우고, 작곡하는 법도 배워 이틀 만에 자작곡을 썼다. ‘크리스탈’이라는 발라드였는데 이 노래로 1500여 명이 지원한 가요제에서 장려상을 탔다. 그때 상금이 30만원이었다. 은상은 변진섭 씨가 받았다.
-이틀 만에 자작곡을 만들다니 믿기지 않는데요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크면서 나도 모르게 인생이 감성이 길러진 것 같다. 인간의 학교 출신과 운명의 학교 출신으로 나눈다면 나는 후자 쪽이다. 곡을 비교적 쉽게 쓰는 편이다. 음악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한계를 넘어서려면 최소한의 재능이 있어야 하고 운명의 학교 출신이거나 지독한 공부가 뒷받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 노래 부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특히 그룹 산울림 노래를 며칠씩 따라 부르고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타고난 재능을 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신인 가요제에서 장려상을 탄 후 아주 유명해졌겠습니다
신인 가요제 입상을 계기로 한동준, 김건모, 지근식, 최준영 등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 신촌, 압구정동 등의 라이브 카페에서 만나 놀면서 음악적 감수성을 더욱 기르는 토대가 됐다. 2학년 때 교내 음악 동아리 ‘아르페지오’를 만들었다. 내가 회장이었는데 동아리의 목적이 가요제에서 상 타는 거였다. 공부 열심히 안 한 친구들을 위주로 그들의 음악적 재능과 개성을 눈여겨봤다. ‘우리는 아마추어는 지향하지 않습니다. 가요제 입상을 목표로 하는 프로페셔널한 인재만 원합니다’고 내걸고서 지원을 받았다. 가수 한경일, 럼블피쉬 최진이가 바로 ‘아르페지오’ 출신이다. 임용수, 홍현종 씨 등 현재 연예인 매니저로 활동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가수 김건모와 같은 해군홍보단 출신인 거로 압니다
가요제 입상 경력으로 해군홍보단에서 35개월 복무했다. 김건모를 포함해 추가열, 김용만, 지석진, 김경민, 심현섭 등이 내무반 동료였다. 당시 바다 위에서 음악을 더 배웠던 것 같다. 돌고래를 보고, 낙조 등을 보며 감성을 길렀다. 이승철의 ‘서쪽 하늘’, 윤미래의 ‘떠나지마’ 등에 그때의 감수성이 많이 반영돼 있다. 제대 후 1988년 즈음 작곡가 지명길 선생님의 도움으로 1집 음반 ‘윤명선 솔로 앨범’을 냈다. 수록곡 모두 작사, 작곡했다. 그 후 둘째 형이 2집 앨범 제작에 투자했는데 금전적 어려움과 제작 경험 부족으로 죄다 날렸다. 무일푼으로 지내던 중 유재하 가요제 출신의 가수 정혜선 씨(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가수로 출발했는데 어떻게 매니저로 업을 바꾸게 됐습니까?
어느 날 내가 존경하는 뮤지션에게 취객이 귤 껍데기를 던지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제작자가 돼서 여자친구(정혜선)의 음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2년 ‘아껴둔 사랑을 위해’를 부른 가수 이주원의 매니저로 입문해 배우 장동건, 방송인 김승현, 가수 김신우 등을 거쳐 1994년 박진영의 1집 ‘날 떠나지마’ 때부터 박진영의 매니저로 일했다. 당시 내 별명이 ‘경옥고’였다. 거의 매일 오전 6시 30분에 방송국에 출근(?)해 라디오, TV 연출자 등에게 한방음료 경옥고를 돌렸다. 그때 사이다가 300원이고 경옥고는 1500원쯤 됐으니 엄청나게 비쌌지만 밤샘 작업을 밥 먹듯이 하는 PD들이 아주 좋아할 거라 믿었다. 선배한테 돈을 꿔서 경옥고를 샀고, 나는 차에서 자거나 MBC 지하 식당에서 매니저 형들에게 밥을 얻고 먹으며 지냈다. 참, MBC 경비원들에게는 가끔 ‘운지천’이라는 비싼 음료를 줘서 아주 친해졌고 그 덕분에 경비실 침실을 쓰기도 했다. ‘경옥고’가 연예가에 회자했고, 소문 덕분에 박진영을 만나게 됐다. 이때부터 내 인생이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6년 반 일했는데 난생처음 제대로 돈을 만져보게 됐다.
-이후 음반 제작자로 변신한 건가요?
1999년 제리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다. 가수 김사랑의 1~2집 제작을 했지만, 실패만 맛봤다. 그 외에 그룹 삼총사, 가수 이불, 마골피 등의 음반에도 손을 댔는데 다 말아먹었다. 솔직히 운도 없었던 데다 제작자로서 능력과 실력 등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김사랑과 일할 때 홍익대 대학원생이었던 장승효 작가를 만났고, 그를 통해 미술 큐레이터 일을 하게 됐다. 설치미술가 장승효를 전속 예술가로 계약해 미술 관련 일을 4년간 했다. 2001년 세계 도자기 엑스포 광주 행사장 상징조형물, 2002년 오송 국제 바이오 엑스포 메인 상징조형물 제작 등에 참여했다. 박진영한테는 힙합, 무대, 춤, 퍼포먼스 등을 배웠고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예술가와 만나 사상, 철학, 심리 등에 관한 다양하고 풍부한 식견을 넓히게 됐다.
-본격적으로 곡 작업을 한 것은 언제부터인지요?
2001년 심수봉의 ‘진실 그 사랑’을 비롯해 장나라의 ‘물망초’, 보보(강성연)의 ‘청혼’ 등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작사, 작곡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2004년, 장윤정의 ‘어머나’가 탄생했다. 주현미, 송대관, 김혜연, 엄정화 등 7명의 가수가 다 거절했고 장윤정이 8번째였다. 장윤정 소속사 인우프로덕션 홍익선 대표가 ‘노래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며 장윤정과 함께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어머나’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노래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고 곡을 줬다.
진짜 좋은 작품은 순식간에 운명처럼 찾아온다. 사실 ‘어머나’도 그랬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주변에서 여자들이 ‘어머나!’라는 감탄사를 하는 게 수십 차례 들려왔다. 반가워서 ‘어머나’, 아기가 넘어져서 ‘어머나’ 등. ‘어머나’라는 단어가 인간 본성, 여성성의 상징이고 이걸 잘 쓰면 대중에게 꽤 설득력이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단어를 뼈대 삼아서 음악을 만들었다. ‘까만 안경’은 남자의 마음을 감춰주는 매개체로, 약한 면을 숨기는 위선적인 남성성의 상징물이다. ‘서쪽 하늘’은 운명적인 슬픔을 하나의 단어로 설명해준다. ‘로꾸거’는 앞으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말로 가사를 채웠다.
-곡 작업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운명의 학교 출신인 것 같다. 주로 아침에 곡을 쓰는데 5분 안에 코드와 멜로디가 한방에 나오는 경우가 잦다. 마치 답안지를 베껴 쓰는 것처럼 단번에 말이다. 돌이켜 보니 어릴 때도 내가 처한 상황을 즉흥적인 노래로 자주 흥얼거렸던 것 같다. 나는 음악의 기본은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기교가 아니라 감성이 중요하다. 음악은 학습보다는 삶의 고통을 통해 만들어진다. 아마도 많은 작곡가가 그럴 것이다. 한 달에 수십 곡을 한꺼번에 쓸 때도 있다. 지금 내 컴퓨터 안에 미발표곡이 한 400곡쯤 된다.
-등산 마니아라고 들었습니다
주말이면 홀로 산과 바다를 자주 찾는 편이다. 앞으로 음저협 회장으로서 4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려면 든든한 체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자신 있다. 15년간 등산했고 금주한지도 15년이 넘었다. 지리산, 한라산, 설악산 등 틈날 때마다 간다. 심신을 단련하는데 정말 좋다. 내 노래에는 산에서, 바다에서 배운 자연의 경험이 많이 녹아있다. 산과 들, 바다를 만나는 건 일종의 운명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태생이 자연인 것 같다. 이런 생활과 내 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아내(정혜선 씨)가 새삼 고맙다. 대학교 때 만나서 11년 교제한 끝에 98년 결혼했는데 당시 아내가 유명했다. 1989년 제1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조규찬이 금상을 탈 때 ‘나의 하늘’이란 노래로 은상을 받았고 2집까지 발표했었다. 음악적 감수성도 상당하다. 내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김용습기자 snoopy@sportsseoul.com
사진│최재원기자 shine@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