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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강렬한 휘광(輝光)은 오히려 시야를 가릴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도 그렇다.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화려하면 할수록 가려진 삶의 진면목이 많아지는 게 세상의 이치다.
‘마라톤 왕’ 손기정(1912~2002).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삶도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금메달리스트’라는 애잔함까지 더해지며 그의 나머지 인생은 올림픽 금메달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갔다.
스포츠서울은 1월 31일자 3면에 손기정의 친일논란을 다양한 사료와 심층적 취재로 파고들며 그의 투철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3·1절 10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손기정 톺아보기’ 제 2편에 해당하는 특집 기사를 마련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베를린 올림픽 이후의 손기정의 굴곡진 인생과 고난의 비망록(備忘錄)은 많은 걸 시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한남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쳤던 민족적 영웅은 해방이후 변방에서 바람처럼 떠돌았다. 권력의 재편과정에서 친일파가 권력의 중싱부로 다시 진입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서글픈 자화상을 떠올리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초인적인 기록손기정의 마라톤 풀코스 기록을 살펴보면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다<표 참고>.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 손기정의 대표적인 이 어록은 그의 기록을 통해 입증되고도 남는다. 1935년 한해에만 무려 7번의 풀코스를 완주하는데 특히 3월~5월까지 두달여간 4번의 대회에 출전해 2시간 20분대의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3번이나 수립하며 우승했다. 초인적인 기록이다.
요즈음 마라톤 선수들은 봄 가을에 각각 한번씩 풀코스에 도전하는 게 일반적이다. 대한육상경기연맹 김돈순 사무처장은 “풀코스를 뛰고 몸을 회복하는데 대략 3개월 정도가 걸린다. 손기정 선생님의 기록을 살펴보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상식을 벗어난 도전”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트레이닝 방식도 시대를 앞섰다. 당시 손기정은 400m 800m 1500m 대회에도 출전하며 스피드 훈련에 크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프런티어 정신이 그야말로 충만했다. 기록의 순도 역시 뛰어났다. 1935년 11월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작성한 2시간 26분 42초의 세계기록은 1947년 보스톤마라톤에서 제자 서윤복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12년 동안 유지됐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세운 올림픽기록도 16년간 지속됐다.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벡(체코슬로바키아)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이 기록을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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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올림픽 이후 계속된 일제의 탄압일제의 입장에선 손기정은 눈엣가시였다. 일약 민족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손기정을 대중과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데 혈안이 됐다.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꺼져가던 민족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언론은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하고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불씨를 지폈다. 일장기 말소라는 필화사건을 일으킨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폐간과 무기정간이라는 철퇴를 맞았다.
일제는 1936년 10월 17일 손기정이 귀국한 뒤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환영회는 그해 11월에야 총독부 학무국 주최로 조촐하게 열렸는데 그것도 참석자를 서울시내 학교 체육교사로 한정하는 억지를 부렸다. 우승기념 행사도 철저하게 제한했다. 조선체육회가 주관한 손기정 남승룡 체육관 건립 추진 계획도 중지시켰다. 이밖에 동아일보가 추진한 ‘스포츠 조선 세계 제압가’ 공모 역시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자연스레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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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고 기공비(紀功碑)에 얽힌 사연 일제는 치졸하고 교활했다.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기념하기 위한 기공비(紀功碑)는 1937년 6월 26일 양정 동창회의 이름으로 대운동장에 세워졌다. 제막식은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이 입회한 가운데 열릴 정도로 삼엄했다.
당시 일제는 서대문 경찰서장을 통해 기공비 건립과정에 온갖 간섭과 지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문은 일본어로 쓰되 앞으로 제2,제3의 선수가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 비문을 중앙이 아닌 왼쪽에 쓸 것을 지시했다. 될 수 있는 한 비문을 볼품없게 만들어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의식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비석 위에 씌여졌던 갓조차도 미관상의 이유를 내세워 그해 8월 12일 강압적으로 벗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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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수모주기와 보성전문 입학손기정이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체육과에 낙방한 사실을 아시나요? 그랬다. 손기정은 1937년 3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체육과에 응시했지만 보기좋게 떨어졌다. 여기에는 일제의 교활한 노림수가 숨어 있다. 아사히 신문은 철봉에 매달린 손기정의 사진과 함께 ‘마라톤 왕 손기정. 그러나 마라톤보다는 입시가 더 어려웠다’며 그의 낙방 소식을 보도하면서 한국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손기정은 이후 인촌(仁村) 김성수에게 부탁해 보성전문에 특례입학하지만 이 또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는 손기정의 사상을 문제삼아 그의 사회생활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태화관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회가 종로 경찰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손기정은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이 경찰의 감시로 피해를 입게 되자 짧았던 1년간의 보전 생활을 뒤고 하고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부에선 그의 학비를 일제가 제공했다는 억지 주장도 펼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학비는 성제육영회와 명월관 주인 이종구가 모두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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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의 강제 은퇴그 짧은 1년간의 보성전문 재학 기간이 올림픽 이후 선수생활의 전부였다면 믿을 수 있을까.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달고는 더 이상 국가대표를 하지 않았다고 맘 먹은 그였지만 현역 생활은 충분히 더 연장할 수 있었다. 그랬던 손기정이 돌연 은퇴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메이지대학 유학의 조건이 바로 현역 은퇴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손기정을 두려워했다. 손기정이 뛰는 모습에 한국인들이 하나로 모여 결집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일제의 압력에 의한 손기정의 현역 은퇴는 많은 걸 시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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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결혼,강복신은 누구인가?베를린 올림픽 이후 가장 달콤한 순간이라면 단연 결혼이 아니었을까 싶다. 1939년 ‘마라톤 왕’의 결혼은 장안이 들썩할 정도로 화제를 뿌렸다. 당대 조선 최고의 여자육상 스타이자 신여성이었던 강복신(1916~1944)이 바로 손기정의 아내가 됐다. 여자 육상 200m와 멀리뛰기 조선기록 보유자였던 강복신은 평양 부호의 딸로 일본 유학 후 서울 동덕여고 체육교사로 일하다 손기정과 결혼했다.
일본 니카이도여자체육전문학교(현 일본여자체육대학) 유학생 출신인 그는 조선일보 고봉오 기자의 소개로 손기정을 만났다. 고기자의 특종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장안의 화제였다. 매스컴은 당대 최고의 육상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결혼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인기잡지 ‘삼천리’는 두 사람의 신혼가정을 방문해 달달한 뉴스를 보도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단란했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복신은 억척같은 신여성의 삶을 사느라 건강을 돌보지 못해 1944년 급성간염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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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과 손기정3.1 운동의 밑그림을 기획한 것으로 밝혀져 최근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몽양 여운형은 손기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몽양의 둘째 아들인 여홍구가 손기정의 양정고보 동기 동창생이었기 때문이다. 일장기를 달고 뛰는 걸 꺼려했던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출전도 몽양의 적극적인 제안에 따라 이뤄졌다는 게 여러 문헌을 통해 밝혀졌다.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와 정치인이기 전에 체육인이다.
YMCA 야구부 주장으로 1912년 일본원정을 다녀온 것은 물론 축구협회장,농구협회장,탁구협회장,권투협회장 등을 두루 거친 만능 체육인이다. 해방이후에도 조선체육회 11대 회장,미군청 체육부장을 역임했다. 한국 신문사상 스포츠면을 따로 만든 것도 그가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가 최초였다.
손기정은 여운형이 일제 패망 직전 출범시킨 건국동맹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몽양은 1944년 건국동맹 출범 당시 노농군 편성을 계획했고,손기정을 연락책으로 삼아 육군 조병창 책임자인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의 접촉을 시도한 사실이 여러 문헌과 사료에서 입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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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간첩단 사건손기정은 강복신과의 사이에서 1남1녀를 뒀다. 첫째 딸 손문영(78)은 제자 이창훈에게 시집보냈다. 손기정이 발굴한 이창훈은 1958 도쿄 아시안게임 마라톤 금메달,1956 멜버른 올림픽 4위에 올랐던 스타플레이어 출신. 손문영과 이창훈 사이의 아들이 바로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이다.
손기정의 막내인 손정인(76)씨는 굴곡진 그의 인생의 또 다른 아픈 손가락이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손정인은 당시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손정인은 당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소개로 한 재일동포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는데 이 동포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쪽 사람도 도와주고 있었다는 게 나중에 알려져 큰 문제가 됐다.
이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엮으려고 했던 중앙정보부는 손정인이 손기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수사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재단 사무총장은 “외삼촌은 물론 할아버지도 1970년대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은 걸로 알고 있다”며 가슴 아픈 가족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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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돌던 주변인해방이후 손기정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고난의 비망록만 세월의 두께만큼 켜켜이 쌓였다.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직장에서 보수를 받고 선수를 키워본 적이 없었다.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면서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적 변방으로 내몰렸 듯이 그 또한 바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마라톤왕’ 손기정은 당당했다. 정치와 권력에 빌붙지 못하는 태생적인 반골 기질은 손기정의 대쪽같은 인생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였다. 그는 역사와 민족 앞에 결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jhkoh@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