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 우승축하연 뒤풀이 박용곤 회장
지난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우승축하연 뒤풀이에 참석해 선수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고 박용곤(왼 두 번째)두산그룹 명예회장. 제공 | 두산베어스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구단주가 말단 직원의 고민을 들어준다고 폭탄주를 같이 마시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지난 3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고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메이저리그에 빠져 살 정도로 소문난 ‘야구광(狂)’이었다. 1932년 서울에서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81년 두산그룹 회장직에 오르고 1년이 지나 OB베어스(두산 베어스 전신)를 창단했다. 당시 OB 창단에 이바지했고 매니저와 운영팀장~홍보팀장 등을 역임하며 20년 가까이 구단 프런트로 일한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고인의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 시대에도 어울리는 진취적인 리더”라고 표현했다.

워낙 야구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박 명예회장은 창단 원년부터 어린이 회원 모집과 더불어 2군 팀 창단을 이끌었다. 구 총장은 “당시엔 30대가 되면 은퇴하는 문화였는데 회장께서 메이저리그의 팜(Farm·육성) 시스템을 벤치마킹해서 장기적인 비전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말했다. 스카우트 비용을 줄이고 체계적으로 유망주 관리를 하는 메이저리그 육성 모델에 일찌감치 눈을 뜬 것이다. 구 총장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11월 (당시 연고지였던) 대전구장에서 2군 테스트가 열렸는데 박 회장께서 직접 현장을 찾기도 했다. 이듬해 이천 2군 구장을 건립하는 등 개혁적인 면이 있었다”고 돌이켰다. 여기에 당시 선수단이 요구한 수당 역시 박 회장은 “프로는 돈”이라며 메이저리그식 메리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구 총장은 “최초엔 1경기 승리 수당 100만 원, 200만 원으로 시작해 이후 큰 규모의 수당으로 발전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바르고 미래 지향적인 정책이라고 여기면 타 구단과도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구 총장은 “사장단 회의를 거치면 의사결정이 늦으니까 직접 삼미, 해태, MBC 등 당시 구단주에게 전화를 걸어서 회의를 주재하셨다. 좋은 정책을 전 구단이 공유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확고했다”고 강조했다.

오비베어스 창단식 박용곤 회장
OB창단식 때 모습. 제공 | 두산베어스

현재 두산 코치진과 프런트 역시 고인을 말할 때 ‘화수분 야구의 뿌리’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늘 인화를 강조했다. 인화로 뭉쳐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능력이 결집해야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OB판 팜 시스템’은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1~2군에서 알짜배기 선수가 꾸준히 등장하는 두산식 화수분 야구의 디딤돌이 됐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탁월했다. 구 총장은 “박 회장께서 현장에 오실 때면 직원들은 긴장하면서도 무척 좋아했다”며 “말단 직원의 고민을 거리낌 없이 듣고 폭탄주도 함께 마셨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1997년 IMF가 터진 뒤 직원이 13명이나 구단을 떠났는데 아직도 그들은 베어스를 사랑한다. 당시 회장의 덕에서 비롯된 게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워낙 야구를 좋아해 선수들의 기록을 줄줄 외웠다는 박 명예회장은 거동이 불편해진 뒤에도 휠체어를 타고 전지훈련장을 찾았다. 구 총장이 박 회장에게서 진정성을 느낀 또 다른 기억 중 하나는 그룹 내 다른 가족이 야구단에 간섭하지 않도록 직접 통제한 것이다. 그는 “형제가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도록 ‘야구는 감독이 하는 것이고, 경영은 사장만 한다. 그리고 총괄은 구단주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늘 반복하셨다”고 했다. 또 잠실구장이 원형 그대로 유지된 것 역시 박 회장의 공로였다고 한다. 구 총장은 “과거 (잠실구장을 같이 쓴) MBC나 현재 LG 등이 한때 잠실구장 규격을 줄이자는 얘기를 했는데 고인은 ‘야구는 3루타가 존재해야 묘미’라며 동의하지 않아 그대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1984 일본전지훈련 격려 방문 박용곤 회장
1984년 일본 전지훈련에 방문한 박용곤 명예회장. 제공 | 두산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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