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혁 이승호

[스포츠서울 정하은기자]이 희열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지난 3개월간 방송된 KBS2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이하 씨름의 희열)을 본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씨름의 희열’은 태백장사와 금강장사들을 각각 8명씩 선출해 대결을 벌여 최종 승자를 뽑는 프로그램. 씨름의 본질에 집중하면서도 그간 스포츠중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씨름의 기술과 선수들 고유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며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했다.

무엇보다 모래판 위 샅바를 맨 선수들은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아이돌 연습생을 연상시키며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수원시청 씨름단 소속 이승호(35), 임태혁(32)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2020 설날장사씨름대회’ 금강장사를 차지한 이승호와 ‘제1회 태극장사 씨름대회’ 초대 태극장사에 오른 임태혁은 그야말로 ‘씨름의 희열’ 최대 수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팬들이 길에서 만나면 밭다리 걸어달래요.(웃음)” 최근 수원선수촌에서 만난 이승호, 임태혁은 방송 후 뜨거운 반응에 얼떨떨하면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승호는 “댓글에서 한 중학생이 씨름 선수와 결혼하는게 꿈이라고 하더라. 팬분들 반응을 보며 참 많이 웃는다”라고, 임태혁은 “편지를 정말 많이 보내주셔서 하나하나 클리어 파일에 끼워 보관해놨다. 볼 때마다 힘이 많이 된다”며 ‘팬 바보’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민속씨름계에선 이미 정상을 찍은 베테랑 선수들이다. 이승호는 민속대회 금강급을 8번 석권한데 이어 2016년 천하장사 대회에서 금강·태백 통합장사 우승까지 포함해 통산 9회 정상에 올랐다. 금강장사 14번에 빛나는 임태혁은 기술 씨름의 진수를 선보이며 경량급 씨름계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밭다리, 잡채기 등 기술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빠른 움직임으로 모래판 승부를 겨루고 이승호, 임태혁의 씨름은 보는 이들에게 짜릿한 긴장감과 쾌감을 안긴다.

금강급에서 1, 2위를 다투는 라이벌이자 수원시청 소속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팬들에겐 ‘금강 형제’ ‘수시즈’로 불리며 티격태격하는 케미스트리로 사랑받고 있다. 함께 출연해서 의지도 많이 됐을 거 같다는 질문에 “비즈니스 관계다”라고 너스레를 떤 두 사람. 서로 장난을 치다가도 “서로 힘이 많이 됐다. 방송을 통해 더 친해졌다”며 애정을 표했다.

‘씨름의 희열’을 통해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는 이들이지만 사실 씨름 선수들은 오랜기간 비인기 종목이란 설움을 견뎌야 했다. 임태혁은 “시합을 해도 모르는 사람 더 많았다. 씨름 경기가 거의 매달 있는데, 보통 평일 낮에 하다 보니 설날이나 추석 아니면 볼 기회가 많지 않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요즘 씨름 안 해?’란 말을 들으면 속상했다. 나는 잘 하고 있는데, 우승도 매번 하는데 몰라주니 서럽기도 했다”고 담담하게 털어놨다.

묵묵히 자신의 기량을 펼쳐 오던 두 사람은 방송을 통해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이들은 개인의 인기보단 씨름의 부흥에 더 큰 바람을 내비쳤다. 이승호는 “내가 씨름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고민은 늘 한다. 올림픽은 금메달을 따지 않고 출전만 해도 모든 선수들이 응원받지만, 씨름은 정상에 올라도 아무도 못 알아주는게 서러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씨름의 희열’ 이후 저희를 응원해주는 팬분들을 위해 더 잘해야겠다는 목표와 의지가 생겼다”며 “저희 개인보다는 수원시청 씨름팀, 더 나아가 씨름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 한다. 몇몇 선수만이 아니라 묵묵히 노력하고 있는 많은 씨름 선수들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졌음 좋겠다”라는 염원을 전했다.

‘씨름의 희열’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었다. 이승호는 “처음엔 ‘이 방송을 사람들이 볼까’하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분들이 씨름의 재미를 같이 느껴주시고, 저희 선수들 역시 방송을 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았다. 특히 이번 기회에 어린 선수들과 소통할 수 있었는데, 저희 못지않게 씨름의 발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더라”라고 소회했다. 임태혁은 “초반 경기에서 계속 져서 부담감이 컸다. 코치님이 원래 제가 하던 대로, 힘빼고 재밌게 하라고 하셨다. 승부욕과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잘되더라. 아직도 배울게 너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씨름의 희열’을 통해 성장한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씨름의 희열’로 새로운 부흥기를 맞은 씨름이지만 방송 이후 이 열기를 어떻게 이어나갈지는 선수들에겐 숙제로 남았다. 이승호는 “이제 시작인 거 같다. ‘씨름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씨름에 관심이 생긴건 뜻깊은 결과지만 그 관심을 어떻게 이어받아서 키워나갈지는 선수들과 씨름협회가 더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숙제인 거 같다”며 우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임태혁
‘제1회 태극장사 씨름대회’ 결승전에서 김기수를 꺾고 승리한 임태혁이 포효하고 있다. 사진 | KBS 제공

이승호와 임태혁은 태극장사까지 가는 파이널 라운드 8강전에서 다시 만났다. 임태혁은 ‘2020 설날장사씨름대회’ 결승전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이승호와 운명의 장난처럼 8강에서 다시 격돌했고, 2대1로 4강 진출권을 따냈다. 이 기세를 몰아 임태혁은 김기수와의 결승전에서 노련미 넘치는 경기로 3대0 승리를 거머쥐었다. 초대 태극장사에 등극한 임태혁은 “정말 욕심났던 타이틀이었다”며 “원래 싸인할 때 ‘금강장사’라고 쓰는데 이제 ‘태극장사’ 임태혁이라고 쓴다”며 밝게 웃었다.

당시를 회상한 임태혁은 “시작부터 집중이 잘되고 긴장보다 설렘이 컸다. 자신있게 하면 되겠다 싶었다”며 “김기수, 노범수 같이 젊고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제가 씨름을 더 오래 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될 거 같다”는 다부진 다짐도 전했다. 우승상금 1억은 받은 임태혁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해 마스크를 기부하겠다는 따뜻한 계획도 전했다. 임태혁은 “상금이 들어오면 함께 출연했던 선수들에게 회식을 쏘고 싶다. 또 최근 코로나 확산으로 고통받는 국민들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로 씨름경력 25년차에 빛나는 이승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한 친구의 권유로 씨름부에 들어가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임태혁은 초등학교 5학년 당시 친형을 따라 시작한게 발단이 됐다. 이승호는 씨름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씨름은 남녀노소 관계없이, 샅바와 모래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친근한 스포츠다. 최근 씨름 동호회도 많이 생겼다고 하더라. 아쉽게도 씨름장이 별로 없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거 같다. 배드민턴처럼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됐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씨름의 희열’이 시즌2로 돌아온다면 꼭 출연하고 싶다는 바람을 덧붙인 이승호와 임태혁은 “씨름 후배 선수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다. 씨름의 부흥을 위해 할 수 있는데까지는 다 하고 싶다”며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jayee212@sportsseoul.com

사진 | KBS, 수원시청 씨름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