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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예기’ 곡례편에 따르면 “천자에게는 후가 있고, 부인이 있으며, 세부가 있고, 빈이 있으며, 처가 있고, 첩이 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자의 정실부인을 후라 하고, 부인 이하 첩까지는 천자를 모시는 여인들의 등급이다.
‘예기’ 혼의편에는 “또한 천자에게는 부인이 3명, 빈이 9명, 세부가 27명, 어처가 81명이며, 첩은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그 수효를 삼천궁녀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실로 규모에서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수많은 궁녀들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 자체에서 궁녀를 뽑을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서도 궁녀를 공급받았다. 중국이 다른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궁녀가 이른바 공녀(貢女)였다. 공녀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보내지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보통 강대 국가였던 황제국가가 고려나 조선에 미혼이면서 젊은 여자를 요구해왔다.
삼국 시대 이래로 금혼령을 내리고 공녀를 선발하여 보냈다. 13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었던 만큼 원나라는 내정간섭을 이어가며 공녀를 공물로 요구하였다. 1275년(충렬왕 1년)부터 1355년(공민왕 3년)까지 80년간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170명. 원나라 고관들이 사적으로 데려간 공녀까지 포함하면 약 2000 명 이상의 고려 여인이 원나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1348년(충목왕 4년)에 건립된 탑으로, 원래 경기도 개풍군 부소산 경천사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본의 궁내대신이 불법 반출하였다가 반환되어 지금은 용산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실내에 전시되고 있다.
경천사는 고려 공녀 출신으로 황후가 된 기황후의 원찰(시주자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었다. 탑의 조성 경위를 알려주는 발원문에는 ‘원나라 황제인 순제와 기황후, 황태자를 위해 조성한 탑’이라 써있다.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던 공녀는 명나라가 건국된 후에 재개되었다.
홍무제와 건문제 연간에는 공녀 요구가 없었으나 영락제와 선덕제는 조선 공녀를 요구하였다. 영락제는 명나라의 3대 황제로 대외 원정으로 유명하다. 만리장성 이북으로 밀려난 몽골과 잔당을 멸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넘은 것과 대함대를 아프리카 케냐 까지 보내고, 안남(현 베트남)을 정벌하였다.
조선 특히 태종은 영락제의 안남 정벌 후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태종은 공녀 진상 중지를 요청했지만 강성한 명나라의 위협에 처녀를 선발해 공녀로 바쳐야 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금혼령을 내리고 진헌색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전국 각 도에 관찰사를 보내 처녀들을 뽑아오도록 하였다.
공녀의 조건은 나이는13세에서 16세 사이, 결혼하지 않은 처녀, 미모를 갖춘 양갓집 규수였다. 조선시대 1408년(태종 8)에서 1430년(세종 12)까지 20여 년간 총 7차례 114명에 이른다. 고향을 떠나 명나라로 보내진 공녀들은 황실의 궁녀나 귀족의 처첩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거리의 기생으로 끌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삶을 마감했다.
공녀를 전송하던 권근(1352~1409)도 그녀들을 위해 시를 남겼다. “…부모와 이별하려니 말이 멈추지 않고 눈물을 참고 닦아도 다시 떨어지네…”
<역사 저널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