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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장강훈기자] 총재의 갑작스러운 사임. 한국야구위원회(KBO)는 8일 오전 그야말로 불 난 호떡집이 됐다. 지난달 25일 새해 첫 이사회(사장회의)에서도, 지난 4일 기술위원회를 구성하고, 7일 넥스트 레벨 트레이닝 캠프 2차 훈련 개막 때에도 정지택(72) 총재는 올해도 KBO 수장으로 직책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루 사이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KBO 내부와 몇몇 구단 관계자들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얘기는 들었다” “스트레스가 심했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관료 출신이자 대기업 부회장으로 50여 년간 일한 정 전 총재로서는 비상식이 상식이 되기도 하는 야구계의 의사결정 과정과 인신공격성 비난을 감내할 체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 전 총재는 공황장애 증세로 치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KBO 안팎에서 제기한 ‘건강상 문제’가 총재 추대 484일 만에 스스로 물러난 원인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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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전 총재의 공과를 논하기에는 한국 야구가 처한 위기가 너무 심각하다. KBO가 유소년 육성 기치로 내 건 ‘넥스트 레벨 트레이닝(Next Level Training)’은 정작 KBO가 가장 절실하게 추진해야 하는 사업이다. 정 전 총재도 “내 퇴진이 야구 개혁의 밀알이 됐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해관계에 따라 반목과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뿌리 깊은 폐단을 바로잡아 달라는 당부다.
등 떠밀리듯 맡은 자리다. 정운찬 전 총재가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날, 이사회를 통해 총재 후보로 추대됐다. 사전 교감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운찬 전 총재의 임기 말에 일부 구단을 중심으로 차기 총재 추대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임 총재가 퇴진을 발표한 날 반강제로 추대됐으니, 출발부터 허수아비 내지는 욕받이로 간택 당한 것과 다름없다. 총재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할 바탕이 없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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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는 규약에 따라 1개월 이내에 새 총재를 추대해야 한다. 총재는 구단주 회의인 총회에서 의결하지만, 실무는 이사회가 주도한다. 이르면 이달 열릴 2차 이사회에서 신임 총재 추대 안건이 상정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새 총재가 추대될 수도 있다. 각 구단은 정 전 총재의 사임 소식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코로나 확산 탓 적자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시기라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입맛에 맞는 총재를 추대해 이른바 KBO기금 등을 헐어 구단의 손해를 보전하려는 구단이 있을 수도 있다. 야구계가 그렇다.
정 전 총재를 깜짝 추대할 때 이사회 일원으로 있던 대표이사는 두산 전풍(2017년 7월 취임) 삼성 원기찬(2020년 4월 취임·구단주 대행 겸임) 대표이사 뿐이다. 전임인 정운찬 전 총재(2017년 11월 추대)까지 포함하면 전 대표이사만 이 과정을 들여다봤다. 총재보다 사장이 빨리 교체된다는 의미다. 수도권 구단의 한 대표이사는 “총재 선임 과정의 프로세스를 모른다”며 “KBO가 총재 선임과 관련한 프로세스를 마련하지 않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KBO 핵심 관계자는 “이사회에서 구단주들의 의중을 반영해 후보를 모시지 않겠는가. KBO는 총재 선임에 관여할 수 없는 위치”라고 말했다. 종합하면 프로세스를 잘 아는 사장이 총재 추대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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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구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어 물밑 교섭으로 판을 짜 놓고 요식행위만 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리그 커미셔너를 결정하는 과정으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네 개 구단 사장은 취임 100일도 안된 새내기다. 구단 현안 챙기기도 바쁜데 한국 야구 전체를 들여다볼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야구계 개혁을 주도할 인물이 총재가 돼야 한다”는 전 정 총재의 마지막 당부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KBO리그는 뒷걸음질 칠 위기다.
zzang@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