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 “사실 내 연기는 늘 똑같다. 그래서 요즘은 늘 나를 넘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고민하곤 한다.”
드라마 ‘미생’(2014)의 사람 좋은 멘토 오상식 부장,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의 서슬 퍼런 통치자 박통, 그리고 지난해 가장 뜨거운 화제를 모은 드라마 JTBC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의 엔진’을 자처한 진양철 회장까지…배우 이성민의 연기는 관객, 연출자, 제작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힘이 있다.
인물에 완벽히 동화돼 관객의 몰입도와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그의 연기력에 이견을 달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연기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믿고 보는 배우’란 표현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이유기도 하다.
|
|
|
이성민은 1일 개봉한 영화 ‘대외비’에서 다시금 부산 지역 숨은 정치 실력자 순태로 분해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영화는 대선과 총선이 같은 해 열린 1992년 부산을 배경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정치지망생 해웅(조진웅 분)이 권력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그렸다.
이성민이 연기하는 순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다가도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 한 통으로 당의 공천후보를 바꾸는 막강한 힘을 지녔다. 그러나 영화는 순태의 나이도, 직업도 알려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그의 대사를 통해 권력자임을 짐작하고 절름거리는 다리로 전사(前史)를 유추할 뿐이다.
“순태가 뭐하는 사람인지 나도 모르겠다.(웃음) 시나리오에는 ‘클래식한 수염이 있는 짧은 머리 아저씨’라고 묘사돼 있었다. 다리를 저는 설정도 시나리오에 나와 있다. 아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순탄치 않은 사연이 있겠구나 싶어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란도 같은 인물로 설정했다. 풋내기 정치 지망생인 해웅에게 ‘권력은 네가 얻는 게 아니라 내가 점지해주는 것’이라는 힘을 보여준다. 단순 악역이라기보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죽음을 사주할 때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려 했다.”
지역 토호 중 있음직한 인물이지만 누구도 만나본적 없는 인물이기에 순태 역을 참고할 만한 롤모델도 마땅치 않았다. 이성민은 “나 역시 한 번도 이런 사람을 만나본 적 없다”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권력 중의 권력, 세상에 있을 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
|
이성민은 경북 봉화 출신이다.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던 소년 이성민의 친구는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비디오테이프였다. 이성민은 “영화를 좋아했던 부친 덕분에 집에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있었다. 덕분에 어린 시절 영화를 자주 접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스무살 재수생 시절 연극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건 이런 어린 시절 환경의 영향이 컸다. 라면, 커피프림, 떡볶이 국물로 배를 채워도 무대 위가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성민은 “돌이켜보면 내 연기 인생의 슬럼프는 20대 연극하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사람이 무서웠다. 연극은 사람들과 함께 무대에 서야 하는데 작업하는 게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공황장애인 것 같다. 대본을 못 읽어서 시골에 가서 막노동을 한 적도 있었다.”
이성민은 ‘공황장애’인지도 모른 채 연기에 푹 빠져 살았던 그 시절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느라 가족들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 지금은 이렇게 먹고사니 다행이지만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내 갈 길만 가느라 많이 힘들었을 우리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부모님은 아들이 한 달에 만원도 못 버는 그런 삶을 바라지 않으셨다. 내가 선택한 길을 걷느라 푸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늦깎이로 조명받는 지금의 연기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성민은 “확실히 시청률이 높은 작품에 출연하면 주변 반응이 달라진다. 마치 TV 처음 나온 사람처럼 전화가 쏟아진다. 내 연기는 똑같은데 다들 연기 얘기를 하니 민망하기도 하고…작품이 흥행하면 배우도 잘 되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이후로 권력자나 재벌 연기에 연거푸 도전하는 그는 “아마 감독이나 투자자들이 전작의 이미지를 보고 캐스팅하는 것 같은데 힘을 지배하는 역할이다보니 연기할 때 힘이 달리곤 한다”며 “계속 노인 역할을 하느라 진짜 노인이 되면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차기작은 밝고 경쾌한 역할을 맡고 싶다. 무거운 역할은 많이 했으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mulga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