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41주년을 맞은 한국 프로야구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여자야구는 프로야구가 성장한 41년 동안, 프로·실업팀 없이 사회인 야구로만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에 스포츠서울은 한국 여자야구의 현주소를 알아보고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스포츠서울 | 황혜정기자] 창단 11년만에 거둔 전국대회 ‘1승’. 긴 시간 동안 이 팀을 지켜온 누군가는 지난한 시간이 스쳐 지나가며 벅차오르는 감정에 그라운드를 한참이나 바라봤으리다.
이화여자대학교 야구 동아리 ‘이화플레이걸스’가 최근 감격의 전국대회 통산 첫 승을 거뒀다. 이화플레이걸스는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에 등록된 47개 야구팀 중 하나이니 사회인 야구팀이라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야구 ‘동아리’다.
1886년 개교해 학부 재학생만 1만9000여명, 총 15개 단과대학, 76개 전공이 운영되고 있는 4년제 종합대학으로 지·덕·체를 겸비한 인재의 요람인 이화여대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학풍 덕에 교내 스포츠 동아리가 다양하고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단과대학별로 동아리가 있어 매년 교내 총장배 대회까지 열리는 축구를 비롯해 농구, 배구는 당연하고, 야구까지 동아리가 존재한다. 연맹에 등록된 여성 사회인 야구선수가 1000명이 채 안 되는 현실에서, 전국 유일의 여자야구 동아리가 운영되고 있는 것도 바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내 손으로 직접 해보자’는 학내 분위기 때문이다.
여자 사회인야구팀들 사이에선 연습경기에서라도 이화플레이걸스에 지면 ‘굴욕’이라 여기곤 한다. 그만큼 전력이 약하다. 이화플레이걸스는 2012년 창단돼 전국대회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던 팀이었다.
예전에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한 시민리그에서 1승을 올린 적은 있지만, 한국여자야구연맹 주최로 1년에 3~4번 있는 전국대회에서는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다. 그랬던 팀이 지난 10월22일 전국 여자야구대회 중 가장 큰 규모인 ‘LX배 여자야구대회’에서 광주스윙이글스여자야구단을 상대로 21-3 대승을 거두며 그토록 염원하던 전국대회 첫 승을 맛봤다.
졸업생으로 이화플레이걸스에서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직장인 김혜원 씨는 동아리 창단 멤버로 그간의 고난을 다 지켜봐 온 산증인이다. 김 씨는 “창단 당시 얼기설기 팀원을 겨우 모아 나갔던 대회가 LG배(現 LX배)였다. 그렇게 11년 뒤에 같은 대회에서 운이 아닌 우리만의 힘으로 첫 승을 일궈낼 수 있어서 정말 뿌듯하다”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전국 유일무이한 ‘여자’야구 동아리. 전국에 수많은 대학이 있고, 야구 동아리는 많지만, 온전히 여학생만을 위한 여자야구 동아리가 존재하는 곳은 이화여대가 유일하다. 김 씨는 “동아리가 성장하려면, 같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타 대학 여자야구 동아리가 생겨야 한다. 10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여전히 생기지 않고 있다. 그렇게 외롭고도 어려운 길을 가고 있었는데, 전국대회에서 첫 승을 올려서 참 감개무량하다”라고 돌아봤다.
대학 동아리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전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팀원 수급 자체에 제약이 있다. 또 공부하는 학생 신분으로 취미 동아리에만 몰두할 수도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화플레이걸스는 그간 최약체였다.
그러나 결국 해냈다. 김 씨는 11년만에 첫 승을 올릴 수 있었던 비결로 ‘차곡차곡 쌓여온 누적 경험’이라고 말했다. “신입생 때 들어와도 4년 뒤에 졸업하고 동아리를 떠나는 친구들이 많다. 그래도 나같이 대학을 졸업해도 야구가 좋아서 계속 남는 친구들이 몇 있다. 그런 사람들이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쌓여오다 보니, 결국엔 신구조화를 잘 이룬 올해 첫 승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결과가 이제야 나왔다”며 담담히 지난날을 되짚어가던 김 씨의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이 녹아있었다.
이화플레이걸스가 최약체였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전문적인 코칭이 부족한 것도 큰 몫을 한다. 대학 동아리 특성상 엘리트 선수 출신 코치를 모셔 와 지도를 받는 건 사치다. 이화여대에는 야구를 할 만한 정식 규격의 야구장이 없어, 구장 대여비 등을 제하고 나면 동아리 운영비가 빠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화플레이걸스는 동아리 역사를 통틀어 6개월을 제외하곤 나머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엘리트 출신 정식 코치 없이 고학년 선배가 저학년 후배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동아리를 운영해왔다. 이런 환경에서 비약적인 실력 향상을 이루기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지난달 반가운 ‘공짜’ 코치가 나타났다. 바로 여자야구 국가대표로 올해 양상문 감독, 정근우 코치와 함께 국제대회를 누빈 대표팀 주전 3루수 김현아다. 이화여대 체육과학부 재학생이기도 한 김현아는 이화플레이걸스의 딱한 사정을 듣고 흔쾌히 시간이 날 때마다 지도에 나서기로 했다.
김현아는 그렇게 동문과 첫 만남 이후 몇 차례나 동아리를 찾아 열정적인 코칭을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현아는 “부원들이 정말 순수하게 야구라는 운동 자체를 즐기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야구 욕심이 많은 친구가 많아서 질문도 생각보다 많이 하더라. 나도 의욕 것 최대한 내가 아는 선에서 더 많이 도와주고 있다”라고 했다.
부원들은 너도나도 국가대표 코치에게 다가가 “어떻게 하면 스윙을 강하게 때릴 수 있는지 궁금해요!”, “평소에 힘을 기르기 위한 근력 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요?”, “공을 세게 던지려다 보니 원하는 곳으로 가지 않아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등등 질문을 쏟아내며 높은 학구열을 보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연필만 잡던 이들은 대학에 와서 야구공과 배트를 처음 잡았지만, 열정만큼은 국가대표를 뛰어넘는다.
김현아 역시 정식 엘리트 야구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중학생 때 남동생을 따라 유소년 야구 클럽에서 야구를 시작해 구력만 5년이 넘는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와 올해 여자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돼 프로야구 레전드 출신들에게 전문적으로 훈련을 장기간 받았다. 자신이 익혀온 나름의 비결을 학교 선·후배·동기들에 아낌없이 전수하고 있는 셈이다.
프로야구 지도자도 이화플레이걸스를 돕고 싶어한다. 한국여자야구연맹 관계자는 “지난 3일 연맹 주최로 열린 ‘2023 여자야구 클리닉’에 재능기부 일환으로 참석한 두산베어스 조성환 코치가 이화플레이걸스 이야기를 듣고 ‘정말 한번 이화여대에 가서 코칭하겠다’고 단언했다”라고 귀띔했다. 그렇게 홀로 버텨왔던 이화플레이걸스가 천천히,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성장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여학생들의 야구 관심도와 참여도 역시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김혜원 씨는 “야구에 대한 관심도가 10년 전과 달리 확연히 달라졌다. 10년 전에는 학생문화관 앞에 동아리 홍보 부스를 차려놔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동아리 입단 제한 인원을 둘 정도로 교내 학생들의 지원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실력 있는 후배들도 들어와 동아리 실력이 올라가는 것도 같다”며 웃었다.
‘변화가 시작되는 곳(Where Change Begins).’ 이화플레이걸스가 가는 모든 길이 곧 역사요, 변화의 시발점이다. 최초의 길을 걷는 이화플레이걸스는 오늘도 함께 걸어갈 동반자를 기다린다.
et16@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