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이퀄라이저3’를 봤다. 주연을 맡은 ‘덴젤 워싱턴’은 미 정부 최고의 특수요원으로 활약하다 그 생활에 염증을 느껴 은퇴한 이후 조용히 살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불합리한 폭력에 노출되며 피해입자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악당들을 물리치고 평화를 일궈낸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1편에서 세계관과 주인공의 능력을 잘 표현한 덕분에 액션영화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2편에서 살짝 삐끗했지만 3편에서 주인공이 행복을 찾으며 시리즈를 잘 마무리했다는 평을 받는 것 같다.
최근 이런 내용의 작품들이 굉장히 많다. ‘리암 니슨’ 주연의 ‘테이큰’ 시리즈,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존 윅’ 시리즈, ‘밥 오덴커크’ 주연의 ‘노바디’, 그리고 개봉한지 꽤 오래됐지만, “아직 한 발 남았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원빈’의 ‘아저씨’ 역시 이런 내용이다.
사실 너무 우려 먹는다는 생각도 든다. 오죽하면 “은퇴한 특수요원들이 모이면 세계정복도 가능하겠다”라는 농담까지 영화팬들 사이에서 있었을까. 그나저나 정말 앞서 언급한 영화 속 주인공들이 모이면 세계정복이 가능할까? 호신술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정리해봤다.
중요한 키워드는 ‘은퇴’와 ‘특수요원(혹은 암살자)’이다.
몸은 단련돼 있고, 눈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현역’이 아닌, 배가 나오고 나이도 많이 먹어 ‘은퇴’를 한 것이다. 주인공 개인의 사정도 있지만,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현장에서 더이상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은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화가 진행되는 시점에서의 악당들이 보기에 눈앞의 주인공은 그저 힘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젊은 시절 날아다녔다 하더라도 이제는 몸을 생각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늙은이일 뿐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적들과 정면으로 교전을 벌이는 병사가 아니라 적진에 침투해 정보를 빼오거나 주요인물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요원 출신들이다. 존 윅의 경우는 조용히 타겟을 제거하는 암살자였다.
이들은 항상 다수의 적에 둘러싸일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주변 사물이나 지형 등의 사전조사를 철저히 해, 상대를 제거하거나 위기에서 벗어날 때 이를 잘 활용한다. 그리고, 군복이 아닌 일상복을 더 잘 어울리게 입는다. 청바지에 티 하나 걸친, 혹은 정장을 말쑥하게 빼입은 늙은이들을 악당들은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자,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그동안 칼럼에서 다뤘던 여러 내용과 겹치지 않는가? ‘내가 호신술을 익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제목의 칼럼도 있었다. 호신술은 호신술을 펼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상대에게 대비를 할 수 있는 신호를 제공하면 안 된다.
그리고, 눈앞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 상황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했다.
호신술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정당당’한 ‘정면대결’이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는 나보다 피지컬적인 조건이 뛰어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혼자 다수를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급격히 재미없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구간이 바로 주인공이 적들과 정면대결을 펼칠 때다.
적진 한가운데서 거의 초능력자 수준의 능력을 발휘해 혼자 수십, 수백명의 악당들을 쓸어버리는데 지금껏 잘 만들어왔던 캐릭터가 무너지는 것 같아 흥미가 사라진다. 물론, 화끈한 액션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클라이맥스를 제공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영화 초반의 주인공들을 모으면 세계 정복은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 후반의 주인공들을 모으면 “한 나라 정도 없애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스승에 대한 에피소드를 하나 공개해본다. 필자가 대만에서 스승으로부터 수업받던 시기의 이야기다.
늦은 밤에 야시장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붐비는 야시장이다 보니 걷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일행 중 한 명이 식사거리를 받아 자리로 오는 과정에서 다른 테이블의 남성에게 부딪히며 음료를 살짝 쏟았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남성은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 그런데, 술을 한잔 했는지 반응이 너무 거칠었다. 우리 일행분이 나이도 훨씬 많고 계속 사과를 하는데도 소리를 지르고, 팔로 밀고 삿대질을 했다.
결국 제일 어른이시던 스승이 일어나셔서 그쪽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런데도 상대의 폭언과 거친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우리 테이블로 달려와서 엎어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필자가 ‘저 사람 너무 심한데?’라고 생각한 순간, 스승은 귀가 안 들린다는 제스처를 하며 상대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실제로 스승은 어릴 때 사고로 귀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제스처를 본 상대는 오히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들릴 줄 알았나 보다.
그러자 스승은 귀를 기울이는 손짓을 하며 그 사람에게 한발짝 다가갔다. 상대는 또 소리를 질렀고 스승은 또 귀를 기울이며 한발짝. 그러다 어느새 상대의 바로 옆까지 안전하게 접근한 스승은 상대의 팔을 낚아채 악수를 하곤 자리에 앉혔다.
팔을 낚아채는 속도와 악수할 때의 힘에 놀랐는지, 그 상대는 이후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호신술은 이렇게 펼치는 것이다.
노경열 JKD KOREA 정무절권도 대한민국 협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