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혼 소송 중 다시 소환된 30년 전 ‘비자금’ 논란
■ 태평양증권(SK증권) 인수 자금 출처는…노 관장 “노 전 대통령 자금”
■ 대법원 판결, 2심 뒤집나?
[스포츠서울 | 최규리 기자]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 동안 약 5000억 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되었습니다.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으로 받아 조성된 이 자금은 저의 책임 아래 대부분 정당 운영비 등 정치활동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깐 이 모든 시작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에서 출발한다. 30여년 전 소문으로만 돌던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의 4000억원 가·차명계좌 보유설’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노 전 대통령이 지목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이런 해괴하고 황당한 얘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부인했지만, 수사 끝에 모든 것을 인정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눈물까지 훔치면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다.
전 대통령의 비자금 거래 사실인정은 전 국민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줬다.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비자금 수수 시인, 14대 대선 자금 문제 등과 얽히며 결국 1995년 11월 서울구치소에 수감된다. 구속되어 갇힌 지 2년1개월여 만에 석방되지만, 이는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으로, 단순히 노 전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비자금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30년 후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300억원의 존재가 딸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30여년 만에 새로 드러난 것.
◇ 엄마가 보관해 둔 ‘선경 300억원’ 메모, 1심 뒤집긴 했는데
지난달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가사2부(김시철 김옥곤 이동현 부장판사)는 전날 역대 최대인 1조3808억원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노 관장에게 현금으로 분할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1991년 선경건설(SK에코플랜트 전신) 명의 약속어음과 메모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원이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흘러 들어갔다고 봤다.
이 메모는 김 여사가 1998년 4월, 1999년 2월에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을 기재한 것이다. 여기에 ‘선경 300억원’이 쓰여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여사는 또 ‘선경 300’이라는 문구가 기재된 봉투에 액면가 50억원짜리 어음 6장을 넣고 보관했다고 한다.
노 관장 측은 항소심에서 메모와 어음을 증거로 제출하며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300억원을 건네는 대신 최 전 회장은 담보로 선경건설 명의로 이 어음을 전달했으며, 이 돈이 1991년 태평양증권 인수나 선경(SK)그룹의 경영활동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1심 결과를 뒤집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재판부는 이 돈이 SK그룹 성장의 종잣돈이 됐다고 판단하며, 재산분할 액수를 1심의 20배 수준으로 높였다. 역대급 비싼 이혼 값이 나온 배경이다.
이에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요구하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고 항변했다. 당시 최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 해인 1988년 30억원을 준비해 갔는데, 노 전 대통령은 “사돈끼리 돈을 주고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물리쳤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미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확보한 노 전 대통령이 과거 돈을 돌려보낸 상황에서 이런 약속(활동비)을 하면서 약속어음을 받았다는 것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 가정의 가치와 비자금은 별개
“통치자금을 조성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할 터인데 이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유용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내리시는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겠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1995년 대국민 사과문 발표 당시 이같이 발언했다. 엄연한 ‘검은돈’임을 인정한 것. 지속적으로 논란이 돼 오던 정경유착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꼴이 됐다.
당시 여신 규제에 묶여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경은 현금을 동원해 태평양 증권을 인수했다. 이에 지금도 이때의 자금 출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비자금이 SK그룹 성장에 기여했다는 논란이다.
대척점의 최 회장 측은 “태평양증권의 매입 자금은 선경 계열사에서 조달한 자금이다. 대통령 사위라는 이유로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관련 자료가 없다며 이 주장을 배척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원이 최 전 회장에게 흘러간 것으로 인정하고, 노 전 대통령이 ‘방패막’ 역할을 했다고 인정한 것.
되돌아보면, SK그룹이 노 대통령 후광으로 성장한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대통령 ‘사돈’에 대한 밀어주기로 SK그룹이 변곡점 마다 성장했다는 의미다. 이에 양측의 주장이 어떻든, 비자금·보호막 논란은 피해 갈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법조계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유·무형적 기여가 인정되더라도 그것을 노 관장의 기여로 볼 것이냐가 상고심에서 다시 쟁점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비자금 논란이 대법원 확정판결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gyuri@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