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장강훈 기자]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시간이 확 떠오르네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협회 임원의 눈가가 잠깐 붉어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을 수도, 이제는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간절함이 다시 떠올랐을 수도 있는 기억의 소환.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아쉽다”는 말이 뒤따랐다.
“R&A에도 문의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많이 안타깝죠.”
대회를 주관하는 대한골프협회(KGA) 직원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회 취지나 목적 등을 고려하면, 책임감이 없거나 이기적으로 비칠 수 있는 행태가 사라져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그 역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끝없이 기량을 연마해 내셔널타이틀홀더로 우뚝선 노승희(23·요진건설)가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DB그룹 제38회 한국여자오픈(총상금 12억원)은 필드뿐만 아니라 드라이빙레인지와 연습그린에서 땀흘리는 선수들로 빛났다.
경남에서 대회가 열린 충북 음성까지 달려온 한 여성 갤러리는 “폭염을 방불케하는 날씨에도 찡그리는 표정없이 최선을 다하는 여자 골프선수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너무 예쁘다. 예쁜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여건이 될 때마다 대회장을 찾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우승자의 환희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내는 스포츠팬이 훨씬 많다.
때문에 한국여자오픈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권사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대회 첫날 다섯 명이 기권했고, 2라운드 때는 무려 12명이 경기를 포기했다. 출전과 포기는 선수 권리이지만, 이른바 ‘스탯관리’ 때문에 출전한 경기는 끝까지 치러야 하는 의무를 등한시하는 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깎는 행위다.
대회를 치르다보면 예기치 못하게 부상하는 경우도 있다. 회전 운동인데다 경사면을 따라 걷는 행위를 반복하는 종목 특성상 발목, 무릎, 허리, 손목 등 관절을 다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플레이를 할 수 없을만큼 크게 다쳐, 대회장에 있는 의료진이 기권을 권유한 사례가 있느냐다. 진단서만 제출하면 대부분 다음 대회 출전에 무리가 없는만큼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 보인다.
경기를 치를 수 없을만큼 통증을 느껴 중도포기한 선수가 이어 열리는 대회에 프로암과 공식 연습라운드를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프로 선수는 누구나 고질병이 있기 마련이고, 문진만으로도 진단서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근육통은 기본이고, 팔꿈치나 손목, 무릎 등에 염증을 달고 산다. KLPGA는 “대회에 기권하면 상벌위원회에 회부해 소명을 듣는다”고 말했지만, 실제 징계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한국여자오픈에서 기권한 선수들의 사유 중 ‘두통’ ‘컨디션 난조’ ‘담 증세’ ‘목 허리 등 통증’ 등이 특히 눈에 띈다. 대회 전 몸을 푸는 과정에 ‘오늘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티오프 전에 기권하는 게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시작했으면, 꼴찌를 하더라도 2라운드까지 뛰는 게 대회 주관사와 스폰서, 이들을 보러 온 팬에 대한 예의다.
미출전 혹은 개막 전 기권 선수가 만에 하나 있을까 싶어 이른 아침부터 대회장에서 초초하게 기다리는 대기자들의 기회마저 박탈해버리는 행태다. 개인종목이고, 대회 성적에 따라 쌓은 포인트로 시드를 유지하는 게 골프만의 문화이지만, 그래서 동료들을 경쟁자로만 보는 시각은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불명확한 사유로 죄책감없이 기권하는 선수는 최소 3개 대회 이상 출전할 수 없도록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 사실상 선수들의 연합체 성격인 KLPGA가 선수 개개인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규정을 만들리 없겠지만. zzang@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