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보통 안개가 아니다. 코앞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해무 때문에 운전자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시거리 10m도 확보하기 힘든 상황에서 칼치기 끼어들기를 하는 미꾸라지 같은 차가 나타났다. 결국 사달이 났다. 단순 추돌 사고가 아니다. 줄잡아 100대 이상 연쇄추돌사고다.

12일 개봉하는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이하 ‘탈출’)는 2015년 실제 영종대교에서 벌어졌던 사고가 모티프다.

영화는 실제 상황에 상상을 덧입히며 재난물의 공식을 밟아나간다. 극 초반 주요 인물을 소개하고 캐릭터를 쌓는데 투자하는 시간은 고작 10여 분. 이후 빠르게 다리 위를 질주하는 차처럼 사건과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감히 팝콘과 콜라에 손을 댈 틈이 없다. 긴장감과 몰입감에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는다.

사고 차량 중에는 정부가 ‘프로젝트 사일런스’라는 이름으로 비밀리 양성한 살상용 군견을 이송하던 트럭도 있었다. 때마침 군견들이 풀려나면서 다리 위는 아비규환이 됐다. 사고현장에 도착한 헬기가 추락하면서 대교도 붕괴 위기에 처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과연 탈출하는 자는 누구일까.

故 이선균은 영화를 이끄는 화자이자 모든 사건을 매듭짓는 해결사다. 그가 연기한 차정원은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이다.

판단력이 빠르고 정무적 감각이 좋은 정원은 안보실장(김태우 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킹메이커기도 하다. 상처 뒤 홀로 딸 경민(김수안 분)을 키운 그는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해외로 유학보내기 위해 공항에 가던 중 사고를 당한다. 위기를 정무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정원은 주위사람들의 희생과 협업으로 살아남으며 변화하고 성장한다.

이선균은 정원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정치인 정원을 연기할 때는 ‘기생충’(2019)의 박사장이 연상되고 군견들의 위협에서 목숨 건 질주를 할때는 ‘끝까지 간다’(2014)의 고건수가 떠오른다. 예민하고 섬세한 배우의 연륜이 영화 곳곳 묻어났다. 짧은 시간 내면 변화의 간극이 매우 컸음에도 괴리감이 없다.

조박 역의 주지훈은 한때 그가 모델 출신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비주얼 쇼크’로 놀라게 한다. 90년대 가스배달부를 연상케 하는 장발 헤어스타일과 건들거리는 말투,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반려견만큼은 챙기는 조박 캐릭터는 사건이 몰아치는 ‘탈출’의 숨구멍을 만들어줬다.

이외에도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핵심인 양 박사 역 김희원, 골프선수 유라와 친언니이자 매니저 미란으로 분한 박주현, 박희본, 여행을 마친 뒤 귀가 중 재난을 당한 노부부 문성근, 예수정도 각각의 캐릭터 색을 뚜렷하게 내면서 재난물의 매력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김태곤 감독의 연출력도 빛난다. 요란하게 시작한 연쇄 추돌사고를 비롯해 돌진하는 군견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싸움은 서스펜스가 가득하다. 헬기 추락신을 비롯해, 일촉즉발의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인물의 감정을 정확히 포착했다. CG도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다.

자칫 신파가 될수 있을 뻔한 장면도 철저하게 슬픈 장면을 거세하고 담백하게 묘사했다. 웅장한 음악을 OST로 사용하거나 슬로 모션으로 인물의 얼굴을 잡아 감정을 배가시키는 연출을 지양한 게 신의 한수다.

영화는 정원 캐릭터를 통해 국민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려는 위정자들을 꼬집는다. 정치인의 전형이었던 정원이 사고를 통해 무엇이 국민을 위하는 삶인지 깨닫는 메시지는 익숙하지만 강렬하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장면에서 얼굴을 비춘 이선균의 뛰어난 연기가 담겨 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진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