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리어왕’서 아버지 배신하는 ‘고너릴’…‘가화공주’ 캐릭터 변신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연극계 ‘블루칩’ 배우 이주화가 다시 한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 무대와 브라운관에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펼쳐온 이주화가 이번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한 연극 ‘눈먼자들’에서 ‘가화공주’ 역을 맡아 관객과 만난다.

이주화는 30년 넘게 무대와 문화기획을 넘나들며 탄탄한 연기력과 독보적인 색깔을 구축해 온 배우다. KBS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시작해 연극, TV,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특히 연극 한울타리 극단을 이끌며 기획·제작에 출연까지 도맡아 한국 연극계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최근 영국 에든버러에서 1인극 ‘웨딩드레스’를 공연하며 한국 문화의 저력을 세계에 알렸다.

이주화는 이번 작품 ‘눈먼자들’ 역시 단순한 출연을 넘어 작품이 지닌 철학과 감성을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의 저력이 빛날 것으로 기대된다.

◇ 가화공주, 권력을 탐한 ‘고너릴’을 새롭게 변주

이번 작품에서 이주화가 연기하는 ‘가화공주’는 원작 리어왕에서 아버지를 배신하는 ‘고너릴’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단순한 야망가가 아닌, 신념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극중 재탄생한다.

이주화는 “전통 창과 춤사위, 국악기가 더해진 한국적 무대에서 가화공주가 어떤 의미를 지닐지 깊이 고민하고 있다”며 “이 인물이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파멸을 드러내는 캐릭터로 그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 연출 최영환 “눈먼자들, 리어왕이 아닌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

번안각색·연출을 맡은 최영환 동국대 공연예술학과 교수는 이번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한국적인 요지경(瑤池鏡) 속에 담아낸 연극”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단순한 왕권의 몰락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영혼)’을 잃어버리는 과정에 집중했다”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묻고 싶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눈먼자들은 셰익스피어 원작이 그리는 정치적 비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선, 아집, 탐욕, 배신, 분노, 고독 등의 감정이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최 교수는 “리어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왕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오만과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을 빼앗긴(nothingness) 존재가 된다”며 “이 연극은 결국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작품은 단순한 번안극이 아니다. 전통 연희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완전히 한국적인 무대로 탈바꿈했다.

최 교수는 “외국의 원재료를 가져다가 우리 고유의 양념과 레시피로 재해석했다”며 이를 위해 판소리 어법과 창(구음 포함), 전통 춤사위, 국악기(가야금, 북 등)를 활용했다고 밝혔다.

특히 원작 속 주요 캐릭터들을 한국적인 인물로 변주했다. 가화공주 이주화와 리어왕(신황철), 교화공주(전희수), 고지식대감(류창우), 지건장군(이원희) 등이 등장하며 왕조 사회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욕망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주화 역시 이러한 변주가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전통 연희와 결합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색다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익숙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 삶과 죽음, 답을 찾기보다 질문 던지는 작품

눈먼자들은 권력과 배신, 인간의 욕망을 다루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최 교수는 “이 연극은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강조한다.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욕망에 지배당한 삶 역시 ‘산 것’이라 할 수 있는가? 리어왕과 그 주변 인물들이 끝없이 탐욕과 배신 속에서 몰락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산다는 것’의 본질을 다시금 고민해 보게 된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을 좇지만, 결국 모두가 맹목적인 선택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리어왕뿐만 아니라, 그를 배신한 딸들도, 그 주변의 신하들도 결국 ‘눈이 멀어버린’ 존재가 된다.

이주화는 “이번 작품을 통해 단순한 선과 악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다”며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한편, ‘눈먼자들’은 오는 4월11일 저녁 7시 30분 삼척 문화예술회관에서 첫 무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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