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언더스터디 ‘에스터’ 역

배우 인생 67년에 담은 혼신의 힘

한국 연극계의 발전 위한 강한 메시지 전해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대한민국 대표 원로배우 박근형(85)이 데뷔 67년 만에 처음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그에게 무대의 크기는 의미 없다. 세월이 지나도 배우로서의 목마름은 여전하다. 특히 9월 개막을 앞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그의 연기 인생에 또 다른 지표를 제시한다.

박근형은 19일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진행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서 그의 배우 인생과 앞으로 연기할 ‘에스터’와의 관계성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앞으로 한국 연극계를 이어갈 후배 배우들을 아낌없이 응원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미국 배우이자 극작가인 데이브 핸슨의 대표작으로, 지난해 무대에 오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후속작이다. 공연장의 허름한 분장실에서 무대에 오를 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언더스터디인 ‘에스터’와 ‘밸’의 이야기를 그린다.

앞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 역을 연기했던 박근형은 이번 작품에서 이순재(90)와 신구(89)가 맡았던 ‘에스트라공’의 대역 ‘에스터’로 등장한다. 그는 예술과 연극, 인생에 대한 위태로운 질문들과 씨름하며 무대를 향한 간절함을 표현할 예정이다.

◇ 주인공이 대변하는 언더스터디의 인생 ‘공감’

박근형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가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에 자청해서 역할을 맡았다. 박근형은 이번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배우는 수천가지의 역할을 한다. 도전하는 습성과 정신이 있다”고 운을 띄운 후 “나이를 먹은 노년에도 어떠한 역할이든지 시간이 나면 정말 바쁘다는 걸 느낀다. 얼마 남지 않았기에 뭐든 도전하고 싶다”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배우 인생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매 작품에서 중심 역할을 맡아온 박근형이 이번 작품에서는 언더스터디를 대변한다.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이기에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과연 환영받을 수 있을지 염려됐다. 하지만 생활밀착형 연극이라는 점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가 연기할 ‘에스터’는 실제 인물을 다룬다. 박근형은 “노년으로서 곧 사라져갈 앞날을 앞둔 노배우다.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한다”며 “한 번도 무대에 서본 적 없는 언더스터디는 일생에서 기다림의 연속이다. 사회에서 점점 소외되는 사람의 심정을 말해주고 싶다. 몸과 마음을 다해 작품에 도전하고 싶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 한국 창작극에 대한 목마름…대학로에 꽃이 필 날 ‘기대’

1940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박근형은 서울 휘문고 유학 시절 연극부에서 처음 연기를 접했다. 이후 서울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1958년 연극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1963년 KBS 3기 공채 탤런트로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펼쳤다.

박근형은 한국 근대사의 연극 역사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 19세에 연극을 시작한 박근형은 초반 다방과 호텔 등 정상적인 극장 아닌 무대에도 올랐다. 정식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이다.

지금이야 대한민국 대표 배우지만, 정상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시련과 실패도 경험했다. 젊은 시절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신극(新劇)부터 영상의 발전으로 대중매체까지 다채로운 경험을 한 박근형은 40여년 만에 다시 한국 연극의 시대를 예고했다. 지난 시간을 떠올린 박근형은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땐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하지만 무언가 하나 붙잡고 늘어지는 성격이다. 배고픔과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 살고있는 소시민적인 삶이 바로 연극인들의 인생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로의 젊은 연극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세대는 다르지만, 현실적 한계에 부딪힌 연극인들이 추구하는 무대에 대한 갈망은 시간이 지나도 같다는 것이다. 박근형은 “‘무대예술이 배우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배우의 기술이 정체된 현재의 틀을 깨뜨렸으면 하는 마음에 신구 선생님과 함께 작업 중이다. 생명이 다하는 한 계속할 것”이라고 전했다.

“창작극에 배고파 있다”라는 박근형은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가 여러 상을 받는 등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희곡 문학은 없다. 매번 다른 나라의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작품을 못 한다는 게 얼마나 불쌍한 현실인지 모른다”라고 꼬집었다.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만 목 빼고 기대하는 실정. 박근형은 “한국의 창작극들이 수익이 나서 배우·작가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좋은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 노년 배우와 젊은 세대가 전할 감동 메시지 예고

박근형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작품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활활 불타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오경택 연출과 전 배우들이 그를 진정한 ‘대선배’로 인정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는 이번 작품에 대해 “‘고도를 기다리며’가 부조리극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뒤처진 전문 신참 연극인과 사라져 가기 전 노년의 배우를 대변한다. 두 대역배우와 언젠간 연출로서 무대에 설 날을 기다리는 무대 감독 세 사람의 이야기”라며 “표현하기에 따라 다르다. 어떨 때 희극일 것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전통적 변화도 느낄 것”이라고 소개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서 박근형은 김병철(51)과 함께 ‘에스터’를 연기한다. 이들과 함께 ‘밸’ 역 이상윤(44)과 최민호(33), ‘로라’ 역 김가영(45)과 신혜옥(44)이 무대에 오른다.

박근형은 이번 작품을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교하며 “이번 관객들은 한 번에 두 가지 연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할 것”이라며 “노년의 내가 연기할 때 연민의 정을 가득 담아 감동적인 연극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반면, 젊은 친구들이 무대를 꾸밀 땐 색다른 다른 시각으로 표현할 것”이라고 작품에 대한 두 시선을 전망했다.

마지막으로 “배우로서 맡은 역할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며 “열심히 작품을 해보겠다. 기대해줘도 좋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한편 기다림과 반복, 불확실성을 보편적 가치와 시대적 질문을 코미디로 풀이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오는 9월16일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개막한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