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이 K팝 핵심 키워드 굳히기에 들어갔다. ‘세계관 장인’이라는 수식어로 대표되던 복잡하고 난해한 음악 서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쉽고 편안하게 귀에 감기는 이지 리스닝이 5세대 아이돌의 주류 문법으로 자리 잡았다.

라이즈의 이모셔널 팝이나 투어스의 청량한 신스팝 등은 고도의 집중이나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듣는 즉시 기분 좋은 에너지를 선사한다. 제로베이스원과 보이넥스트도어 역시 팝적인 멜로디를 강조하며 대중과 접점을 넓히는 맥락을 공유한다

이러한 흐름의 전환은 단순히 음악적 취향의 변화를 넘어 ‘시대의 욕망’이 아이돌에게 요구하는 역할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5세대 아이돌은 이 변화를 가장 민감하고 영리하게 포착해낸 결과물이라는 분석이다.

저물어가는 ‘느림의 미학’…생존을 위한 15초 ‘속도의 욕망’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콘텐츠 소비의 극단적으로 짧아진 ‘호흡’이 꼽힌다. 틱톡, 유튜브 숏츠, 인스타그램 릴스로 대표되는 숏폼 플랫폼의 확장이 K팝의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3분 이상의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기승전결을 이해하는 흐름이었다면, 이제는 단 15초 안에 대중의 귀와 눈을 사로잡는 강력한 ‘킬링 파트’와 ‘훅(Hook)’이 생존을 결정한다.

5세대 아이돌은 이 숏폼의 문법을 받아들여 곡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챌린지 포인트를 강화했다. 음악이 ‘감상’의 대상에서 ‘소비’와 ‘놀이’의 배경음악(BGM)으로 역할이 바뀐 셈이다.

충성도의 변화, 코어에서 라이트 팬으로의 중심 이동

이전 세대의 K팝은 ‘세계관’이라는 거대 서사를 통해 팬덤 내 결속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BTS가 대표적이다. 이는 소수의 충성도 높은 ‘코어 팬덤’을 결집시키는 데는 강력한 무기였으나, 대중과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5세대가 택한 이지 리스닝은 ‘라이트 팬덤(Light Fandom)’을 빠르게 흡수하는 전략이다. 멜로디와 가사가 직관적이어서 K팝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대중이나 해외 팬들도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공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즐겨야 할 대상’으로 K팝의 정체성을 재정의했다. 덕분에 팬덤의 외연을 넓히고 신규 유입을 촉진하는 데 성공했다.

사회적 피로감 속 ‘정서적 안식처’ 수요

팬데믹을 거치며 가중된 경제적 불확실성과 무한 경쟁의 피로감은 대중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관측이다. 고도의 지적 탐구보다는 일상의 편안함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인기 드라마 시리즈도 장르물에서 가벼운 톤의 코미디로 변화하는 추세다.

5세대 아이돌의 ‘이지 리스닝’은 이 지점에서 가장 영리하게 응답했다. 이들의 음악은 심오한 철학 대신 청춘의 성장통, 첫 만남의 설렘 등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 감성’을 노래한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과거에는 분노와 열정이 핵심 키워드였다. 팬데믹을 거치고 사회적인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가벼운 음악을 요구하고 있다. ‘소프트&멜로’를 요구하는 시대에 이지 리스닝은 자연스러운 발맞춤”이라고 평가했다.

옅어지는 K팝의 예술적 야성

일각에서는 K팝의 정체성이었던 ‘예술적 야성’이 옅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곡을 듣기 위해 세계관을 공부하고, 뮤직비디오의 상징을 해석하며 지적 희열을 느끼던 ‘코어 팬덤’의 시대가 저무는 가운데 ‘정서적 안정’이라는 포장 안에서 K팝의 예술적 고뇌마저 쉬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임진모 평론가는 “표면적으로는 이지 리스닝이 쉽게 만들어지는 느낌이 있지만, 예술성 약화라는 주장은 비약에 가깝다. 때에 따라서는 박박 때리는 음악보다 이지 리스닝이 더 만들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려는 의도 이면엔 예술성 강화가 늘 숙제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K팝 미래를 향한 이 질문이 5세대 아이돌의 밝고 청량한 미소 뒤에 숨어 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