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반 덴 아커 부회장이 빚어낸 ‘우주선’의 미학

“대형 여객기의 소란함 대신, 개인 전용기의 고요한 사유(思惟)를 담았다”

한국이라는 거대한 전장에서 ‘다름’으로 생존하겠다는 르노의 선언

[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인가, 아니면 도로 위를 달리는 조각품인가. 13일 서울 워커힐에서 베일을 벗은 르노의 플래그십 ‘필랑트(FILANTE)’는 후자에 대한 강렬한 웅변처럼 보였다. 르노그룹의 디자인 총괄 로렌스 반 덴 아커(Laurens van den Acker) 부회장은 이 차를 가리켜 “도로 위의 우주선(Spaceship)”이라 명명했다.

그의 말처럼 필랑트는 낯설다. 그리고 그 낯섦은 의도된 도발이다.

◇ 정지한 순간에도 질주하는 ‘긴장의 미학’

반 덴 아커 부회장은 필랑트의 선(Line)을 설명하며 ‘화살’을 언급했다. 시위를 떠나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 혹은 이미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화살의 역동성이 차체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낮고, 길며, 미끄러지듯 뻗어 나갑니다. 우리는 이 차가 정지해 있는 순간조차 앞으로 튀어 나갈 듯한 추진력을 품기를 원했습니다. 검은 캔버스 위에 떠 있는 듯한 후면의 더블 테일램프와 거대한 스포일러는 이 차가 가진 감정적인(Emotional) 속성을 대변합니다.”

전면부를 휘감는 새로운 ‘라이팅 시그니처’는 필랑트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낮에는 검은 그릴과 어우러져 깊은 침묵을 지키지만, 밤이 되면 선명한 빛의 띠가 되어 도로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무채색 일색인 한국의 도로 풍경에 던지는 시각적 충격이다. 특히 그가 제안한 ‘다크 포레스트(Dark Forest)’ 컬러는 깊은 숲속의 신비로움을 머금은 채, 흑백의 도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해방구를 제시한다.

◇ 박스(Box)를 탈피한 공간, ‘프라이빗 제트’의 철학

‘넓은 차는 네모나야 한다’는 명제는 자동차 디자인의 오랜 강박이었다. 그러나 반 덴 아커는 이 기능주의적 사고에 반기를 든다. 그는 필랑트를 통해 “유려한 곡선(Sleek)과 광활한 공간(Spacious)은 모순되지 않음”을 증명하려 했다.

차체 하단의 그래픽 요소를 통해 시각적인 무게감을 덜어내 날렵함을 살리면서도, 휠베이스를 극한으로 늘려 실내를 확보했다. 여기서 그가 추구한 공간의 본질은 ‘밀도’다.

“우리는 대형 여객기(Airbus)의 소란스러움이 아닌, 개인 전용기(Private plane)의 고요함을 원했습니다. 이중 접합 유리가 만들어낸 정적 속에서, 운전자는 ‘오픈알 파노라마 스크린’이라는 기술의 바다를 항해하고, 머리 위 글라스 루프를 통해 밤하늘의 별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사유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경험입니다.”

◇ 서울과 파리, 두 도시의 영혼이 만나다

필랑트는 1만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과 파리의 교감으로 탄생했다. 반 덴 아커 부회장은 한국 디자이너들의 수준 높은 감각과 프랑스의 예술적 DNA가 섞이며 만들어낸 시너지를 강조했다. 한국 소비자가 갈망하는 프리미엄의 가치(공간, 편안함)와 르노가 추구하는 독창성이 타협이 아닌 ‘융합’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반 덴 아커 부회장의 화두는 ‘생존’과 ‘차별화’였다. 그는 냉철했다. 한국 시장에서 르노는 도전자(Challenger)의 위치에 있음을 인정했다.

“경쟁자들과 똑같은 차를 만들어서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름’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자,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입니다. 누군가는 필랑트의 파격적인 디자인을 낯설어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무난함보다는,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할 특별함을 택했습니다.”

르노 필랑트는 묻는다. 당신은 규격화된 상자 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유려한 우주선에 올라타 새로운 궤적을 그릴 것인가. 로렌스 반 덴 아커의 디자인은 단순한 형태(Form)를 넘어, 무채색의 도로 위에서 남과 다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철학적 제안이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