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휴전 협상 결렬, 가장 큰 걸림돌은 핵 문제
이란,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집단적 기억’이 만들어낸 국가의 행동 방식이 핵심
“하나의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시간대가 공존하는 이중 구조 형성”
핵 개발 문제, “단순한 군사력 증강이 아니라, 국가 생존 전략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

[스포츠서울 | 이상배 전문기자] 미국과 이란은 지난 11일(현지 시각)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휴전 협상을 시작했으나 하루 만에 결렬됐다. 미국대표단은 협상 과정에서 “이란이 핵 포기에 대한 명시적 약속이 없었다”라고 밝혔다.
결국 결렬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핵 문제이다. 휴전 결렬은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갈등의 재점화 가능성은 물론, 군사적으로는 직접 충돌보다 대리전 확대 가능성 높고, 경제적으로는 유가 → 물가 → 금융시장 순으로 충격이 확산되며 한국은 에너지·수출·안보 모두에서 조만간 직접적인 영향권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시점에 ‘이란의 역사와 핵 개발<상>’, ‘이란의 핵과 중동 권력 구조<중>’, ‘중동 갈등이 한국 경제·안보에 미치는 구조적 영향<하>’에 대한 문제를 기획 칼럼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란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현재 정치 체제나 외교 전략보다는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집단적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이 만들어낸 국가의 행동 방식이 핵심이다.
이란은 단순한 근대 국가가 아니라, 외부의 침략과 개입, 내부의 변화를 반복적으로 흡수하며 스스로 재구성해 온 일종의 ‘문명단위 국가’이며,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 핵 문제까지 깊게 연결되어 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 특히 키루스 대왕 시기의 통치 방식은 이란 국가 정체성의 기원을 보여준다. 당시 제국은 약 500만km²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와 수천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통치했지만, 단순한 군사적 지배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다양한 민족과 종교에 자치권을 허용하고, 지역 관습을 존중하는 통치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이상주의적 선택이라기보다, 다민족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이러한 통치 구조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페르시아를 군사적으로 정복했지만, 실제 통치 과정에서는 페르시아의 행정 체계와 귀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이란이 단순히 정복당하는 대상이 아니라, 외부 세력을 내부로 흡수하고 재구성하는 독특한 문명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은 이란 사회에 하나의 지속적인 패턴을 남겼다. 외부의 충격에 대해 단순히 저항하거나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내부 질서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생존해 왔다는 점이다.
이란의 지리적 조건 역시 이러한 국가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체 국토의 약 70% 이상이 산악과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고, 실제로 경작할 수 있는 토지는 10% 남짓에 불과하다. 연평균 강수량 또한 세계 평균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자급자족형 경제를 구축하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이란이 자연스럽게 외부 교역과 해상 물류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전략적 요충지의 통제력이 국가 생존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호르무즈 해협이다. 이 좁은 해협을 통해 하루 약 1700만에서 2000만 배럴의 원유가 이동하며, 이는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20~30%에 해당한다. 이란은 이 지리적 위치를 통해 단순한 지역 국가를 넘어, 세계 에너지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란의 집단적 기억을 결정적으로 형성한 것은 근대 이후의 경험이었다. 특히 영·러 협약(1907년)은 이란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협약을 통해 이란은 북부와 남부가 각각 러시아와 영국의 영향권에 편입되는 사실상의 분할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국가 주권이 내부가 아니라 외부 강대국의 합의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현실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이란 사회 전반에 강한 불신을 남겼고, 외부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구조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불신은 1953년 이란 쿠데타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당시 총리였던 모하마드 모사데그는 석유 산업 국유화를 추진하며 경제적 자주성을 확보하려 했지만, 미국과 영국의 개입으로 정권이 무너졌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민주주의 체제조차 외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후 이란 사회에서 반서방 정서와 자주권에 대한 집착은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79년에 발생한 이란 혁명은 이러한 축적된 불만이 폭발한 결과였다.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끈 이 혁명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왕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신정 체제를 수립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내부 갈등 구조를 만들어냈다. 현재 이란은 약 88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국가로, 그중 절반 이상이 30세 이하의 젊은 세대다. 이들은 글로벌화와 개인의 자유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혁명 세대는 여전히 반외세와 자주권을 핵심 가치로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이란은 하나의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시간대가 공존하는 이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의 안보 인식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약 8년 동안 이어진 이 전쟁은 수십만에서 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 피해를 남겼고,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특히 사담 후세인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했음에도 국제사회가 실질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란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 경험을 통해 이란은 국제 질서가 도덕이나 규범이 아니라 힘의 균형에 의해 움직인다는 현실을 체득하게 되었고, 외부에 의존하는 안보는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는 인식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이란은 하나의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외부의 개입을 억제하고 체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억지력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란의 핵 개발 문제는 단순한 군사력 증강이 아니라, 국가 생존 전략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핵은 실제 사용을 위한 무기라기보다, 외부 세력이 쉽게 개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억지력’이자 일종의 ‘보험’으로 기능한다.
결국 이란은 하나의 단일한 국가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요구가 동시에 충돌하는 복합적인 구조가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 구조가 이란을 단순한 협상 대상이 아니라, 예측이 어려운 전략적 행위자로 만드는 핵심 요인이 된다. 이어지는 칼럼 ‘이란의 핵과 중동 권력 구조<중>’에서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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