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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다(44)씨는 축구계에서 꽤나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국내에서 축구전문 디자이너의 효시로 꼽힌다. 국가대표 서포터스 붉은 악마의 상징인 치우천황을 디자인한 것을 시작으로 K리그 클래식의 대전 경남, 챌린지의 광주 등 프로구단 엠블럼이 그의 손을 거쳤다. 울산 대전 전남 제주 등의 시즌 유니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유나이티드의 창단 멤버로 서울 연고 프로구단 만들기에 깊게 관여하기도 했고 다양한 스포츠 마케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으니 요즘은 연말에 열리는 홍명보장학재단의 자선축구대회 ‘쉐어 더 드림(Share The Dream)’의 이미지 제작 작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책상 한켠에는 한 용품회사가 의뢰한 축구공 디자인 시제품이 놓여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가 한창 ‘서울시민구단 서울 유나이티드 창단 운동’을 정열적으로 펼칠 때 만난 이후 근 10여년만의 인터뷰 자리였다. 헤어 스타일이 장발에서 삭발로 바뀐 것을 빼고는 축구에 대한 열정과 꿈을 이야기하는 품새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축구산업 전체를 디자인해보고 싶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대학 시절 전공이 디자인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 디자이너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원래 어릴 적부터 소질이 있었는가.
미대를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해 관광경영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도 학보사에 만평을 그렸다. 내가 87학번인데 시대가 시대여서 걸개그림같은 것도 많이 했다. 졸업하고 첫 직장이 이벤트회사였는데 디자인하고 기획을 담당했다. 이후 광고대행사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을 만들던 회사를 다녔고 IMF 사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축구쪽 일을 하게 됐다. 축구는 원래 좋아했고 1997년부터는 붉은 악마에서 활동했다. 4대 PC통신 연합축구동호회 일도 했다.
-축구도 좋아하고 디자인도 좋아했으니 축구전문 디자이너 1호는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1999년 아사히신문이 낸 ‘J리그의 경제학’이란 책을 읽었다. J리그가 어떻게 탄생했고 첫 시즌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다룬 책이었다. 당시 가와부치 사부로 J리그 회장이 축구를 통해 세대와 세대를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엮는다는 컨셉트를 제시했는데 발상 자체가 대단히 사회학적이었다. 이런 것도 일종의 사회적인 진보라고 느꼈다.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축구 상품을 만든다는 데 포인트를 뒀는데 (그 책을 읽은)이후에는 축구산업 전반이나 클럽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2001년부터 서울시민구단 창단 운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 운동을 전후해 일본 요코하마FC를 현장 취재한 일이 있었다. 당시 요코하마FC는 3부리그에서 2부리그로 승격한 상황이었는데 현지에서 만난 구단 프런트에게 “큰 돈이 생기면 어디에 투자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프런트의 대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는 제일 먼저 프런트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남으면 유소년코치에 투자하고, 그래도 남으면 10대 중후반의 어린 선수에게 투자하겠다고 했다. 우리와는 정반대의 사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선수는 3년에서 5년 정도 클럽을 기쁘게 해주고, 좋은 코치는 10년 정도 클럽에 좋은 효과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좋은 프런트는 클럽의 백년지계를 설계한다. 지금 K리그에도 이런 사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축구 전문 디자이너로서 작품 1호는 붉은 악마의 상징인 치우천황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맞는가.
그 이전에도 친하게 지냈던 구단 서포터스가 부탁해 소소하게 만든 것들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치우천황이 1호다. 1999년 3월 잠실에서 열렸던 브라질전을 앞두고 붉은 악마가 새로운 깃발에 넣을 상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자료 조사를 하다가 치우천황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불패의 상징이고, 붉은 연기도 내뿜고 등등 여러가지로 맞아떨어졌다. 컨셉트를 잡고 만드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깃발 제작비도 대줬고 나도 저작권 일체를 붉은 악마에 기부했다. 이런 상징물이 개인의 권리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혹시 저작권을 넘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나.
(웃으면서)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권리가 있었다면 그렇게 널리 사용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축구 쪽에서 만들어냈던 작품은 대략 몇 개나 되나.
굵직한 것들만 50개가 넘는다. 대전 경남 광주 등의 구단 엠블럼, 박지성축구센터와 WK리그 엠블럼, 지난 여름 열린 동아시안컵 포스터, 경남 수원 대전 등의 시즌 캠페인 디자인 등등이 있다.
-구단 엠블럼을 만들 때는 주로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
역시 지역연고, 팬과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그래서 작업하면서 구단 서포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또 지속적으로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지도 주요 고려사항이다. 클럽 엠블럼 작업에는 보통 6개월 정도가 걸린다.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 가운데 베스트5를 꼽아본다면.
대전 시티즌 엠블럼은 2000년 처음으로 디자인했던 구단 엠블럼이었다. 구단 안팎을 살펴보는 계기도 됐고 서포터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눈 끝에 탄생한 애정어린 작품이다. 경남FC 엠블럼은 제작 당시 서포터들, 구단 관계자, 조광래 감독님 등이 모두 힘을 모아서 만든 작품이었다. 이를 계기로 구단의 정체성이 확고해지고 반응도 좋아서 매우 보람이 있었다. 광주FC 엠블럼은 남도의 붉은 흙과 ‘5월 정신’을 주작으로 상징화한 작품이었다. 비록 지금은 2부에 있지만 곧 1부로 올라와 호남축구의 진정한 멋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붉은 악마의 상징인 치우천황 엠블럼은 언제나 대표팀을 응원할 때는 상대가 주눅이 들만큼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었기에 많은 고심 끝에 나온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처음 사용됐던 브라질전에서 김도훈의 골로 이겼던 그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2년 붉은 악마 4호 머플러와 2006 독일월드컵 응원용 KFA(대한축구협회) 공식 머플러도 추억이 남아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축구디자인만 해서 도대체 밥은 제대로 먹고 살 수 있는지 염려도 된다. 어떤가.
절대 못 먹고 산다. 굳이 내 수입의 비율을 따지자면 축구 쪽에서 얻는 것은 30% 정도다. 잘해야 40% 정도 될까말까. 왜 그렇게 되냐면 수요가 너무 없기 때문이다. 구단에서 머천다이징을 한다고 하지만 모두 규모가 작다. 서울이나 수원 정도가 어느 정도 제품을 다양하게 만들어 파는 정도다. 다른 구단들은 신상품을 만들겠다는 동기부여 자체가 안 된다. J리그는 출범할 때 한 회사가 각 팀의 머천다이징을 통합해 관리했다. 그래서 출범 당시 팀들의 마스코트를 보면 대략 느낌이 비슷하다. 모두 한 회사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통합해 관리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일단 규모의 경제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도 축구 디자인에 천착하는 것은 축구를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1호 전문가로서의 책임감 때문인가.
두가지가 다 해당된다. 앞으로 그냥 상품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축구산업 전체를 설계하고 디자인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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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도록 축구바닥에 있었는데 우리 축구산업은 예전에 비해 얼마나 발전했다고 느껴지는가.
하드웨어는 분명히 좋아졌다. 예전에는 구단이든 협회든 낙하산으로 내려온 관리형의 사람들이 축구계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2002년을 계기로 전문적으로 축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축구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축구계에서 지금 과장 이상의 중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등장으로 고민과 논의의 초점 자체는 높은 단계로 올라갔지만 현실이 열악하다 보니 원하는 것, 꿈꾸는 것과의 괴리가 아직 커보인다. 축구산업 전체로 보면 아직도 초기단계를 벗어날까 말까 하는 것 같다.
구단들도 예전에는 모기업(또는 지자체)이 내려주는 돈을 관리만 하면 됐다. 이제는 돈을 만들고 창조해야만 한다. 구단 자체가 캐시 카우를 가져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팬의 소비여력도 하락세다. 이전에 한중일 클럽이 참가하는 A3대회를 하다 접었는데 그런게 살아나야 한다. 중국은 엄청난 시장이다. 이런 대회를 키워야 우리 클럽들도 기업 후원을 잡기 쉬워진다. 한중일에 러시아 극동지역의 팀들, 베트남 팀들 등을 합쳐 아시아 클럽챔피언십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기존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는 중동국가까지 껴있어 국가별 쿼터가 적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한중일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묶는 리그를 만든다면 자국리그의 중상위권팀들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중계권도 늘릴 수 있고 우리 클럽에 이익이 될 수 있다.
-한때는 서울 유나이티드의 사무국장과 이사를 맡으면서 서울 연고 프로팀 만들기에 앞장섰는데 그때 느꼈던 가능성과 한계는 어땠나.
역시 관건은 운동장이다. 경기장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지금의 잠실종합운동장처럼 (경기장 내에서)상업활동을 할 수 없다면 또 어려워진다. 서울 유나이티드는 처음에 잠실을 연고로 하는 팀을 만들자, 일단 잠실에서 경기를 계속 하면서 명분을 만들어가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경영진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현실에 맞추는 쪽으로 변했다. 효창에서 경기를 하더니 나중에는 노원 마들구장까지 갔다. 이런 견해차이로 내가 서울 유나이티드를 나오게 됐다. 서울같은 대도시는 도시연고가 아니라 경기장 연고다. ‘서울 연고’라는 말보다 오히려 ‘상암 연고’, ‘잠실 연고’라는 말이 맞다. 그런데 경기장을 계속 옮겨다니는 것은 이런 연고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울 연고 프로팀이 정말 현실적으로 등장할 수 있겠는가.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가.
가능하다고 본다. 서울을 연고로 하는 구단이 한해에 200억원을 쓴다고 가정한다면 현재와 같은 구단 운영 체제에서는 아무리 마케팅을 귀신처럼 해도 연간 100억원을 벌기도 쉽지 않다. 경기를 통한 자체 마케팅만으로는 운영이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반드시 번외수익이 필요하다. 경기장이 있으면 방계사업이 가능해진다. 협동조합 형태로 구단을 운영하면서 경기장 내 웨딩홀을 운영하거나 하는 방식이다. 지금 세계적인 트렌드는 구단이 직접 자금을 조달해서 경기장을 짓고 지자체는 땅만 대주는 방식이다. 이런 트렌드의 대표적인 게 올림피크 리옹의 경기장이다. 유벤투스도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 경기장을 만들고 있다. 우리도 지금의 잠실구장 가지고는 사업이 어렵고 차라리 그 자리에 새롭게 축구전용구장을 짓고 설계를 할 때 부대사업 시설을 갖추도록 만들어 운영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맞다. 구단을 지주회사 형태로 운영하면서 그 지주회사 아래에 자회사로 축구단, 호텔, 머천다이징 관련업체 등의 계열사들이 있는 방식이다.
-앞으로 만들고 싶은 축구 디자인이나 축구계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국가대표팀의 이미지가 파편화돼 있는 인상이 짙다. 예를 들어 유니폼은 빨간 색인데 왜 엠블럼은 백호일까 하는 식이다. 일본은 그런 관리를 잘한다. 우리도 대표팀에 캐릭터를 부여해 종합적으로 브랜딩을 할 필요가 있다. 잠실에 프로클럽을 만드는 일도 현실화될 수 있을 때까지 잘 해보고 싶다. 제대로 된 클럽 하나가 생겨 운영모델을 보여줬을 때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K리그도 서울 수원 같은 클럽이 2개 정도만 더 생겨도 프랑스리그 부럽지 않은 수준이 될 수 있다.
위원석 체육1부장 batman@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