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바른\' 오타니[포토]
일본 오타니가 11일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예선B조 체코와 일본의 경기 식전행사에서 체코선수들에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고 있다. 도쿄 |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 장강훈기자] 분했다. 거의 매일 뒤척였다. ‘야구여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정신승리를 외치다가도 다시 영상을 돌려봤다. 참사라는 용어가 붙은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얘기다.

한국 대표팀의 졸전은 선수 구성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스포츠서울이 보도한 것처럼 이번 WBC 대표팀은 역대 최약체가 맞다. 에이스로 부를 만한 투수도, 해결사 역할을 할 타자도 없이 부담감만 잔뜩 짊어지고 대회에 나섰다. “호주전에 올인하겠다”는 대표팀 이강철 감독과 선수들의 외침은 시작도 전에 뒤를 걱정하는 것으로 읽혔다.

운칠기삼이라고, 승운이 따라 승전고를 울릴 수는 있겠지만, 실력으로 원하는 목표(4강)에 도달할 것으로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KBO리그 수준이 지역예선 없이 본선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딱 그정도다.

오타니와 인사나누는 캡틴 김현수 [포토]
WBC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 김현수가 10일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예선B조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에 출전하며 식전행사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선후 오타니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도쿄 |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야구는 변수가 참 많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콜 하나, 비디오 판독에 걸리는 3분 이내의 시간, 예상보다 공격 또는 수비 시간이 길어진 탓에 스며드는 부담감 등으로 요동친다. 국제대회 경험이 적은 선수일수록, 단기전 경험이 없는 선수일수록 변수는 경기력과 직결된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2라운드 진출 탈락 자체는 그리 큰 충격이 아니다. 오히려 경기 결과를 떠나 체코,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이 ‘(야구 자체를 즐기면) 약해도 이길 수 있다’는 허상을 실체로 만들어준 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짜 분했던 건 일본 대표팀의 상징으로 우뚝 선 오타니 쇼헤이(29·LA에인절스)의 작은 행동 때문이었다. ‘같은 선수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부러움 섞인 시샘이 분한 마음의 시작이다.

7회말 볼넷으로 출루, 만루찬스 잇는 오타니[포토]
10일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예선B조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 7회말 오타니가 1사 2,3루에서 볼넷으로 출루하며 베이스를 꽉 채우고 있다. 도쿄 |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한일전 3회말 무사 2,3루. 오타니는 자동고의4구를 얻었다. 배트 보이에게 방망이를 건넨 뒤 정강이와 팔꿈치 보호대를 풀고, 장갑을 벗어 전달하면서 살짝 포옹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약간의 미소도 담겼다. 자신의 도구를 받으러 나온 소년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것으로 비쳤다. KBO리그에서 단 한 번도 못 본 장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잔상이 꽤 오래 남았다. 한국 선수들은 어째서 저런 태도(attitude)를 취하지 못할까. 분노는 여기서 출발했다.

오타니의 야구실력이야 세계가 인정했으니 기술적 강점을 들여다볼 이유가 없다. 다만 메이저리그에서 투타겸업으로 만장일치 MVP에 오르기까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성까지 갖춘 무결점 선수라면, 성장과정에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다. 분한 마음에 기억을 더듬어보니, 고교시절 작성했다는 만다라트 목표 달성표가 떠올랐다. 처음 공개됐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하나씩 뜯어보니 더 화가 났다. 왜 이제서야 이걸 들여다보고 있나 싶어서.

3회말 적시타로 동점득점한 체코[포토]
체코 지마가 13일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예선B조 체코와 호주 경기 3회말 2사 1,3루에서 소가드의 안타때 득점한 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도쿄 |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고교 1학년 때 작성한 그의 초목표는 8구단 드래프트 1순위였다. 초목표를 달성하려면 제구와 구위, 멘탈 등 선행해야 할 목표가 있다. 각각의 서브 목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초목표가 되는데, 작은 목표를 모두 합하면 81가지나 된다. 구위와 스피드(시속 160㎞), 제구 등을 잡기 위한 작은 과제를 매우 세밀하게 적어둔 것도 흥미롭지만, 드래프트 1순위가 되려면 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놀라웠다.

인간성 좋은 사람이 돼야 드래프트 1순위 자격을 갖출 수 있다는 것도 오타니의 생각.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예의와 배려, 신뢰 등이 몸에 배야 한다는 다짐도 새삼 돋보였다.

\'응원 잊지않을게요\'[포토]
김현수 등 대표팀 선수들이이 13일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예선 대한민국과 중국의 경기 5회말 수비를 끝내며 22-2로 승리한 후 응원을 끝까지 해준 응원단에 90도로 머리를 숙이고 있다.도쿄 |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국제대회처럼 변수가 많은 경기는 어차피 승률이 반반이다. 승패를 떠나, 야구인 스스로 ‘존경받을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지가 처참한 성적보다 먼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존경하는 사람이 실패하면, 비난보다 격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한국야구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얘기가 맹목적인 비난만큼 많다. 재건의 초목표를 성적으로 두면, 기술과 기능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올해 WBC는 ‘야구는 즐거워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확인하는 무대로 전개 중이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계 야구의 흐름은 우월한 기술이 아닌 대중과 공감이다. 시작 단계부터 이부분을 놓친 사실이 너무 창피하다. 그래서 분이 풀리지 않는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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