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윤소윤 인턴기자]김사니(38)에게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다.
여자 배구선수 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 자격 획득, V리그 역대 최초로 세트 성공 1만 2000개 돌파. 이는 김사니의 토스로부터 시작된 득점이 1만 2000점에 이른다는 뜻이며, 아직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기도 하다. 영리한 토스워크와 경기를 읽는 예민한 눈, 수준급의 디그 실력으로 다방면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자신의 명성을 당당히 입증했다.
천부적 재능의 세터 김사니는 털털하고 거침없는 성격만큼 인터뷰 내내 대화를 주도하며 자신의 전부였던 배구 인생을 되돌아봤다. 그러나 희귀병으로 투병 중인 반려견 얘기를 꺼낼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시원시원한 플레이의 선수, 또 거침없는 발언으로 배구팬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해설자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승 못 하는 세터'라는 꼬리표에서 '영구 결번 9번'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코트를 떠날 때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던 그의 배구인생은 어땠을까.
◇ 19세의 유망주, '역대급 몸값'으로 코트에 서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배구를 시작하게 된 김사니는 1999년 세계 청소년배구 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을 3위에 올려놓으며 대표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프로팀 입단을 앞둔 시기에는 세터가 약한 팀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제가 신장이 큰 편이라 여기저기서 저를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유망주'였죠."
김사니가 청소년 대표팀으로 활약하던 당시에는 장신 세터가 극소수였다. "그때는 키 큰 세터가 희소성이 있어서 관심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중학교 때 키가 175cm 정도였거든요. 하하. 그러면서 꾸준하게 181~182cm까지 컸던 것 같아요. 요즘은 장신 세터가 많지만 그때는 170cm만 되도 '되게 크다' 이랬거든요."
이후 그는 19세의 나이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계약금을 제안받고 도로공사에 입단했다. "사실 모르겠어요 저는 얼마 받았는지도(웃음). 당시에 고등학생라 그런 계약금이 얼마였는지,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 모르겠는데 여러 구단에서 관심을 많이 주신 건 맞아요. 지에스 칼텍스, 도로공사가 저를 두고 경쟁했는데, 제 선택은 도로공사였어요."
◇ 국가대표 김사니, 태극마크의 무게를 견뎌라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요."
김사니의 첫 올림픽은 2004년 아테네였다. 당시 ‘인생경기’ 급의 활약을 펼치며 예선전에서 러시아와 이탈리아를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이후 큼지막한 세계 무대를 두고 부상 등의 이유로 계속해서 좌절했다. 그리고 2012년, 김사니는 다시 한 번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 섰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은 역대 최고 전력이라 평가받았다. 세대교체가 된 상황에서 김연경, 김사니를 주축으로 황연주, 김희진, 양효진 등 신구 조화 역시 훌륭했다. 막강한 팀 전력과 최상의 팀 분위기를 등에 업은 대표팀은 여자배구 36년 만에 올림픽 4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목전에 두고 대표팀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에 패하며 뼈아픈 눈물을 흘렸다.
"사실 자다가도 그때 생각만 하면 벌떡벌떡 일어나게 돼요(웃음)." 7년이 지난 지금에도 일본에게 무너졌던 순간은 김사니의 기억에 여전히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메달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다들 비웃었어요. 근데 말이라는 게 참 큰 힘이 있더라고요. 할 수 있다고 다짐하면서 계속 게임을 이기고, 메달이 현실이 돼가고 있었는데…."
"제가 사실 4강 때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경기도 못 뛰었고, 마무리도 좋지 못했는데, 메달 땄으면 정말 영광이었겠지만 나름대로 좋은 추억이었어요. 메달을 땄던 못 땄던 지금도 애들이랑 그 얘기를 하면 흥분이 되더라고요. '그때 진짜 좋았다' '멤버가 좋았다'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면서 추억하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추억으로 자리한 영광의 순간이지만 아쉬움 역시 크게 남아있다. "몸관리를 못 한게 제일 후회돼요. 팀워크도 멤버도 좋았고, 그때 연경이도 어렸고(웃음).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배구할 땐 딱 뭉치고 그런 게 참 좋았어요."
◇ '우승 못 하는 세터'→IBK의 MVP가 되기까지
"기업은행 가서 그동안의 한을 풀었죠."
도로공사 시절 김사니는 역대급의 활약을 펼치며 주전 세터로 활약했음에도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2005년 도로공사는 김사니를 포함해 한송이, 박미경, 김미진 등의 막강 선수 군단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우승 문턱에서 계속해서 좌절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쉽지 않으냐는 물음에 김사니는 웃어 보였다. "도로공사 시절에는 챔피언 결정전에 많이 올라갔고, 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멤버였는데도 우승을 못 했어요. 항상 저한테는 ‘우승 못 하는 세터’라는 꼬리표가 달렸었죠."
이후 김사니는 2007년 KT&G, 2010년 흥국생명, 2013년 로코모티브 바쿠(아제르바이젠)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아제르바이젠에서 용병 시절을 거친 후 부상으로 한국에 돌아온 그는 IBK 기업은행 알토스에 입단하며 선수로서 마지막 배구 인생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승 못 하는 세터'였던 그는 IBK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주축 선수로 자리하며,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
"저도 용병 생활을 하고 와서 많이 부족했었고, 선수들도 대표팀에 갔다가 늦게 합류해서 초반에 굉장히 많이 힘들었어요. 이정철 감독님이 저랑 (남)지연이를 불러서 ‘참고 해야 한다. 강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죠. 근데 강하게만 가다 보니까 너무 힘든 거에요!"
평소 '독사'라고 불렸던 이정철 감독이기에, 당시 주장이었던 김사니에게 거는 기대 역시 컸을 터였다. "감독님께서 견뎌야 된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때 대답을 못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근데 사실 그런 지도가 전환점이 됐던 것 같아요. 후반기 갈수록 팀워크도 맞아 들어가고, 컨디션도 올라가면서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런 이정철 감독의 칼같은 가르침과 지도를 등에 업은 김사니와 IBK 팀은 초반의 힘들었던 시기가 무색하게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2014~2015 시즌에는 도로공사와 격돌해 완승을 거뒀으며 김사니는 V리그 여자부 챔피언 결정전 MVP에 오르는 영광도 얻었다.
"MVP, 세터상 다 의미가 크지만 일단 팀 성적이 우선이었어요. 기업은행에 있을 때는 개인적인 업적보다는 팀이 우선으로 잘 됐기 때문에 제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됐던 것 같아요."
당시 감독이었던 이정철 감독은 작전 시간 때마다 선수들에게 큰 소리를 내며 무섭게 지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김사니는 '완벽 세터'라는 수식어답게 한 번도 이정철 감독에게 혼난 적이 없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감독님이나 선수들 앞에서 지적받는 게 싫었어요. 감독님도 완벽을 추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욕심이 있었죠. 그래서 그런 감독님의 지도가 저한테는 떨어지지 않고 계속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이정철 감독은 김사니의 배구 인생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였다. "물론 저를 예뻐하신 건 아니에요. 하하. 그분은 사적으로 누굴 예뻐하고 미워하고 그러는 분이 아니세요."
◇ 배구의 시작과 끝…'영구결번 9번'으로 코트를 떠나다
2017년 5월 4일 김사니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여자 배구선수로는 최초로 영구결번을 부여받으며 팬들의 박수와 후배들의 존경을 뒤로하고 코트를 떠나게 됐다.
"은퇴라는 건 사실 언제고 오는 거고, 누구에게나 아쉽거든요. 당장 정말 막 힘들어 죽겠어도 내가 지금까지 했던 걸 그만두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종목을 불문하고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겪는 부상 역시 은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허리에 부상이 심했어요. 은퇴를 고민하던 시기에 제 마음은 50대 50이었어요. 구단에서도 얘가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하셨죠. 감독님도 저한테 많이 미안해하셨어요. 근데 제가 감독이었어도 저를 믿고 가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제가 참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웃음)."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었음에도 IBK 측은 김사니를 위한 은퇴식을 준비했다. 단 세 시즌을 뛴 선수지만 그 기간 동안 김사니가 보여줬던 활약은 그만한 대우를 받기에 충분했다.
"감독님 말씀으로는 제가 모범적이었고(웃음), 구단에 세운 업적이 크기 때문에 선물을 주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되게 감사했고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요."
선수 시절 내내 4번을 등에 달고 경기를 뛰었던 그는 은퇴 당시 9번을 받으며 코트를 떠났다.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았던 숫자였으나 그 숫자의 의미는 생각보다 컸다.
"원래는 제가 IBK 입단 전까지 계속 4번을 달았는데 김희진 선수가 4번이거든요. 프렌차이즈 스타니까 4번을 제가 받겠다고 할 수 없어서 (IBK 입단 당시) 남는 번호 6번 9번 중에 9번을 골라서 마무리했거든요. 근데 은퇴 직전에 초등학교 친구가 전화가 와서 '축하한다. 너 초등학교 때 배구 시작할 때 9번이었잖아. 마무리도 9번이네'라고 말하는 데 소름이 돋는 거에요. 그때야 기억이 나더라고요. 제 배구 인생의 시작이."
초등학교 시절 처음 코트에 올라 배구공을 잡았던 김사니의 첫 시작도 9번이었다. "그냥 지도 선생님께서 주신 번호인데 친구 연락을 받고 나니 의미가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지금도 구단주분들, 감독님께 감사하고, 그 모든 분이 인정해주시고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이런 큰 선물을 받지 않았나 생각해요."
◇ 해설위원→스포츠아카데미 강사 "종착역은 감독일 것"
"편파요? 저 그 선수들 전화번호도 몰라요!"
2010 리우올림픽 객원 해설위원을 시작으로 김사니는 은퇴 후 SBS 공식 해설위원 자리를 맡게 됐다. 그러나 당시 구단과 협회, 동료들, 그리고 배구팬들은 해설위원 김사니가 아닌 국가대표 세터 김사니를 원했다.
"사실 리우 올림픽을 선수로 가야 하는 상황인데 거절을 했어요. 무릎 부상도 있었고 자신도 없었고 그래서 제가 아닌 차기 세터가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모든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터라 객원 해설 위원의 자리도 그에겐 부담이었다. "처음엔 욕을 먹을 것 같아서 해설도 안 하겠다고 했어요 하하. 선수 제안을 다 거절했으니까. 그런데 이정철 감독께서 '너의 길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해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재미가 있더라고요."
은퇴 후 막막했던 그를 다시 붙잡아 준 것은 해설이었다. 첫 방송 오프닝 당시 덜덜 떨었다던 그는 이제 SBS 대표 해설위원으로 자리했다. 편파 판정 논란에는 특유의 성격답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소휘 이재영 선수의 시원한 배구 스타일을 정말 좋아해요. 근데 그냥 그뿐이거든요. 잘한 걸 부각해서 말한 건 있지만, 편파랑은 다르니까. 저 그 친구들 연락처도 몰라요! 누가 이기고 지고 누가 더 잘했고 못했고 보다는 해설 끝나고 밥 뭐 먹을지가 더 중요해요 저는, 하하."
해설위원 김사니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선수들'이었다. 언제나 촉망받는 세터였던 그였지만 후배들의 그늘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타플레이어들은 항상 주목받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도 있어요. 서브 한 번 치러, 블로킹 한 번 하러 들어오는 선수들이요. 그런 선수들의 이름이나 득점 이런 걸 부각해주려고 노력해요. 이 선수들은 그 한 경기 뛰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을거고, 플레이 하는 횟수 자체가 적기 때문에 그 선수들을 모르는 분들이 이 선수들의 노력과 활약을 알아줬으면 하는 욕심이 있어요."
최근 김사니는 절친 김연경이 대표직을 맡고 있는 '김연경 스포츠아카데미'에서 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일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제가 놀고 있으니까? 하하. 일자리 창출이죠(웃음). 연경이가 해 볼 생각 있냐고 물어봐서 오케이 한 건데 재밌더라고요, 생각보다"라며 운을 뗐다.
"힘든 부분도 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런 재미가 생겼어요. 배구에 내 색이 입혀지는 게 좋고. 아이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연구하면서 저 스스로도 많이 터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서브 하나도 못 넣던 아이가 공격하는 걸 보는데 그 성취감이 말로 표현이 안되더라고요. 보람을 느껴요."
김연경 선수와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전했다. "연경이는 대표예요. 그래서 일하면서 부딪힌 적은 딱히 없어요. 일단 걔가 한국을 자주 안 오니까(웃음). 그래서 크게 부딪힐 일은 없는데 관심은 또 많이 있더라고요? 하하."
인터뷰 말미 "김사니에게 배구란?"이라는 진부한 질문에도 김사니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긴 고민 끝에 그가 건넨 답은 다름 아닌 '애증'이었다. "너무 힘들고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랑하죠. 애인 같은 존재예요. 하하."
자신의 배구 인생 종착역을 그려보기도 했다. "뭐가 됐든 배구 관련 일은 계속할 거예요. 요즘엔 감독을 해 보고 싶어요.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그래도 제 마지막 종착역은 감독이 아닐까 싶어요. 강사 일을 하면서 생긴 꿈이기도 해요. 유소년이든 프로팀이든 상관 없어요. 가르치는 재미가 정말 좋더라고요."
"롤모델은 이정철 감독이냐"는 물음에 웃으면서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이정철 감독님이요? 아니요(웃음). 근데 이 감독님만의 장점도 분명 있거든요. 그런 건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요. 그동안 제가 겪었던 감독님들의 장점을 모아서 좋은 지도자로, 감독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선택의 기로에 서는 순간이 온다. 그 갈림길이 위기로 향하는 길이 될지,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김사니는 그 길목에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직 그의 새로운 인생은 시작되지 않았다. 여전히 고민하고 꿈을 꾸는 '배구인'이다. 좋은 감독으로, 다채로운 배구인으로 새로운 코트 위에 선 김사니의 미래를 응원해 본다.
사진 | 스포츠서울 DB, 김사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