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권오철 기자] 최근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왓챠플레이’에 가입한 이유는 지난 5월 초부터 약 한 달간 방영된 5부작 미국드라마 ‘체르노빌’(Chernobyl)을 보기 위해서다.
드라마는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중북부 키예프 주 북부의 도시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현장을 재현하고, 사건 전후 사정을 재구성했다. 전체적으로 배경이 어둡고 침울하며,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가 거친 기계음으로 전달되는 등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에서 유사한 원전 사고가 발생했지만 방사능이 실제로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선 막연히 가늠할 뿐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비춰진 방사능 노출 피해자들의 실상은 끔찍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참사 그 자체였다.
드라마는 고르바초프 체제의 소련 공산당 정부가 당시 사고를 어떻게 수습했는지를 조명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와 같은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그 결과, 체르노빌 참사는 대외적 체면을 중시했던 소련 정부가 일찍이 지적됐던 원전 폭발의 위험성을 감추고 기만한 거짓말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 드라마는 “체르노빌 참사의 사망자는 4000~9만3000명으로 추정된다”면서도 “소련의 공식적 사망자 수는 1987년부터 지금까지 31명”이라고 소련 정부의 명백한 거짓됨을 폭로한다.
체르노빌을 보면서 자연스레 국내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떠올랐다. 환경부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자는 6649명, 현재까지 사망자는 1459명이다. 아직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뤄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지만 현재까지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조사, 검찰 수사, 재판 등을 통해 드러난 사실 곳곳엔 전 국민을 상대로 벌어진 ‘거짓’이 들어차 있다.
일례를 들면,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은 1993년 가습기살균제 개발에 착수하면서 내부 연구실의 부정적 의견에 따라 1994년 9월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에게 유공 가습기메이트 흡입독성실험을 의뢰했다. 그런데 그 결과 보고서가 나오기 전인 1994년 11월 유공 가습기메이트를 출시·판매했다. 당시 매일경제는 1994년 11월 16일 <유공 가습기용 살균제 선봬 “유공 18억들여 개발..인체 무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명백한 가짜 뉴스다.
유공이 서울대 보고서를 회신한 것은 1995년 7월이지만 해당 보고서 내용에 가습기메이트가 안전하다는 내용이 없음에도 유공은 제품을 계속 판매했다. 이어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이하 옥시)는 1996년 유공으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아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출시했다. 이후 SK케미칼이 2000년 6월 SK로부터 가습기메이트 사업을 인수, 2001년 SK가습기메이트를 출시했다. 이어 SK케미칼이 제품을 만들고 애경산업, 신세계 이마트 등이 유통·판매하는 다양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연쇄적으로 출시됐다. 여기까지 과정을 종합하면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원죄는 유공의 ‘거짓’에 있다고 판단된다. 나머지 관련된 기업들도 그 ‘거짓의 지분’을 나눠 가진으로 의심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진실을 고백하지 않는다. 지난 8월 27일 열린 특조위 청문회에서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대표이사 부회장(전 SK케미칼 대표이사)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피해 대책을 묻는 질문엔 “현재 재판 중”이라며 재판 결과 뒤로 미뤘다. 채동석 애경산업 부회장 역시 고개를 숙이면서도 “재판 결과가 나오면 상응하는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해 이를 지켜보던 피해자들의 공분을 샀다. 다음 날 열린 2차 청문회에서 박동석 옥시 대표이사는 “옥시가 가습기살균제 제품을 세상에 내놨을 때 정부기관에서 안전한 기준을 만들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했다면 과연 오늘 같은 참사가 있어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며 ”2016년에 원료 공급의 책임이 있는 SK케미칼과 관련 업체들이 진정성 있게 배상을 하려고 노력했더라면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저하게 줄었을 것”이라며 책임을 정부와 타사로 전가한 바 있다.
이 같은 옥시의 태도는 지금도 변함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조위에 따르면 락스만 나라시만 옥시 최고경영자는 지난달 29일 영국 본사에서 최예용 부위원장을 비롯한 특조위 관계자들과 만나 사과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특조위는 앞서 거라브 제인 전 옥시 대표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찾았으나 면담에 실패했다. 제인 전 대표는 핵심적인 위치에서 조직적으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상 은폐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의심받는 인물이다. 그는 2016년 검찰 출석 및 국회 국정조사에 불응하고 현재 인터폴 적색수배 중임에도 현재 인도에 머물며 옥시의 아프리카·중동·남아시아를 담당하는 선임 부사장을 맡고 있다. 과연 옥시가 진심으로 참사에 대해 뉘우치고 사과를 한 것인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말뿐인 사과는 또 다른 거짓이다.
konplash@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