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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심언경기자] “첫 주연에 대한 부담감을 이겨내지 않았다. 부담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은 달라진 게 없다. 내 이름 앞에 주인공 하나만 달린 거다. 단역 때도 조연 때도 내 캐릭터에 최선을 다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스포츠서울과 만난 배우 박병은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데뷔 22년 만에 첫 주연을 꿰찼으나 들뜬 기색은 없어 보였다. 다만 “회차가 많아서 피곤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새벽까지 촬영하니 체력적인 부분은 부담이 됐다”며 웃었다.
그는 지난 21일 마무리된 tvN 드라마 ‘이브’에서 LY그룹 최고 경영자 강윤겸으로 분했다. 강윤겸은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이 다 가졌지만, 결핍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라엘(서예지 분)과의 사랑에 목숨까지 던지는 인물이다.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던 그는 갈수록 출렁이는 감정을 터트리며 격정멜로의 축을 담당했다.
“초반에 감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강윤겸 자체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도 않고, 이 감정을 응축시키고 나중에 큰 감정으로 다가가겠다는 플랜을 짰다. 감정 폭이 커서 연기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배우는 울분이든 즐거움이든 감정이 터져 나올 때 쾌감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을 터트릴 수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 집중하고 오롯이 퍼부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20대 때 불같은 사랑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런 열정이 없어지지 않나. ‘나한테도 이렇게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구나’ 했다.”
사실 ‘이브’는 지난해 사생활 논란에 휘말렸던 배우 서예지의 복귀작으로 더욱더 화제를 모았다. 이에 방영 내내 작품성, 연기력과 상관없이 그의 과거가 언급돼 다른 배우들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분위기였다. 서예지가 캐스팅된 후 합류한 박병은이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이와 관련, 그는 “충분히 인지하고 들어갔다. 서예지 씨와 작품을 위해 만난 것이라서 외적인 부분에 신경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우리는 현장에서 작품과 캐릭터에 몰두하면 된다. 오히려 배우와의 호흡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감이 있었다. 어떤 배우였어도 그랬을 거다. 서예지 씨가 단단히 집중하고 나와서 연기하더라. 대본을 봤는데 너덜너덜했다. 분석한다고 밑줄도 많이 쳤더라. 내 대본을 보니까 너무 새 것 같아서 일부러 형광펜으로 줄 몇 개 그었다. 하하. 열심히 해줘서 고마웠다. 같이 연기하면서 호흡을 잘 맞출 수 있겠다 싶었다. 완전 극에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감정 연기가 많았는데 리허설할 때부터 눈물을 흘려줬다. 이라엘이 아니라 서예지 씨한테 감동했다. 그런 감정들이 쌓여서 사랑 신이 절절하게 잘 표현된 것 같다.”
잔악하고 폭력적인 성미에 남편 강윤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한소라로 열연한 배우 유선에 대해서는 “거의 신인의 자세로 연기하셨다. 자기만의 공부방이 있는데 5시간 동안 안 나오고 대본만 봤다더라. 한소라는 1부부터 16부부터 감정이 너무 셌다. 하루에 그런 신이 하나만 있어도 진이 다 빠지는데 그걸 서너 개씩 했다. 집중력도 체력도 놀랍더라. 오늘도 문자가 왔다. 아직도 소라를 못 놓겠다고 마음이 안 좋다고 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너무 좋은 배우였다. 이번 작품으로 처음 봤는데 스스로 반성하고 (유선을)존경하게 됐다. 더 놀라운 건 다른 사람이 바스트 촬영할 때도 자기 연기를 똑같이 해준다. 내가 ‘그만해. 죽어. 이러다가 죽어. 너 할 때나 열심히 해’ 했더니 ‘나 할 때만 이렇게 하면 미안하잖아’라고 하더라. 마음이 진짜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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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이브’는 배우로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택해야만 하는 작품이었다. “격정적으로 누굴 사랑하는 멜로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장르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대본을 보니까 놓치기 싫더라. 베드신 등 화제가 될 만한 것에 대해서 대본을 읽으면서 충분히 생각했다. 하지만 강윤겸에 대한 연민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접근하게 되면 캐릭터와 내가 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위 높은 베드신에도 도전했다. 쉽지 않은 장면이지만 상세한 콘티 덕분에 한층 수월하게 진행됐다는 전언이다. “즉흥적으로 가면 우왕좌왕하고 민망할 수 있는데 촬영 감독님과 감독님이 콘티를 한 달 전에 주셨다. 그런 배려에 감사드린다. 촬영 전 정확히 대본을 숙지하고 장면을 이해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대신 아침저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몸을 만들다가 어깨를 다쳤다. 물리치료도 받고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염증 주사도 맞았다. 처음으로 이런 무게를 받으니까 그랬던 것 같다.”
그가 원하고 원했던 격정멜로답게 극은 강윤겸의 사망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죽을 것 같았다. 어떤 방식이든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결말에 대해서는 한참 못 듣다가 중반 넘어서 감독님께 여쭤봤더니 사망할 것 같다고 하셨다. 어떻게 죽냐고 계속 물어봤다. 알게 되면 지금 연기가 달라질 것 같기도 했다. 결말을 듣고 마음에 들었다. 이라엘과 강윤겸이 떠난다고 행복해질 문제가 아니었다. 엔딩을 보면서 ‘두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는 게 개인적으로 좋았다. 모든 걸 떠안고 가는 느낌이 좋았다.”
‘이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재 ‘탱고’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라엘의 ‘방구석 탱고’ 신을 두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극명히 엇갈렸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장면이 몰입을 깨고 웃음을 자아낸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박병은은 “‘박병은 웃참(웃음 참기) 성공’이라고 하시던데 그건 시청자분들이 그렇게 보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촬영 두 달 전부터 우라나라 챔피언한테 탱고를 배웠다. 나도 탱고를 아예 모를 때는 느끼하고 동양 사람의 정서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탱고를 모르는 시청자들과 똑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배우고 실제로 보면 정말 멋있다. 왜 열광하는지 알겠더라. ‘방구석 탱고’도 그런 게 있다. 처음에는 미친 것 아니냐고 했다. 놀리는 건 줄 알았다. 근데 계속 보니까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전혀 웃기지 않았다. 처음 탱고로 통한, 사랑하는 여자가 내 앞에서 탱고를 선보인다는 것에 더 집중했다.”
첫 주연에 도전하며 부모님은 물론, 절친한 배우 조인성의 축하와 응원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조)인성이는 방송 끝나자마자 전화해서 ‘형 멜로는 너무하는 거 아니냐’, 오늘 눈빛이 장난 아닌데‘ 이런다. 또 주인공 됐다고 기뻐해주고 너무 고맙다. 어머니도 예전에는 제가 벌이가 없으니까 누가 ‘아들 연기한다면서 어디 나오냐’고 물으면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답했다. 지금은 효자가 된 것 같다”며 뿌듯해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배우로서 매력적인 캐릭터라면 언제든 도전할 것을 약속했다. “22년 만에 처음 주연 했는데 앞으로 주연만 하겠다는 건 아니다. 주연만 했던 동생이나 형들 보면 중압감이나 피로도가 높더라. ’저렇게 마음 괴롭게 주연할 바에는 조연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너무 좋은 캐릭터를 주인공보다 연기를 잘하면 훨씬 매력적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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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glasses@sportsseoul.com
사진 | 씨제스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