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이소라가 ‘바람이 분다’의 첫 소절을 부를 때 ‘나는 가수다’의 성공을 확신했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MBC ‘나는 가수다’를 연출한 김영희 전 MBC PD는 프로그램의 성공에 이소라의 공이 컸다고 말하곤 했다.

1993년 낯선 사람들 1집으로 데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보적인 가창력과 표현력, 음악을 대하는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으로 정글같은 가요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 그의 음악세계는 6집 ‘눈썹달’(2004)이라는 명반을 탄생시켰다.

이 앨범은 지난 2004년 한국대중음악시상식에서 올해의 음악인상을 수상했고 2018년 멜론, 한겨레, 태림스코어가 공동기획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선에서 30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대중의 마음을 울린 ‘바람이 분다’가 바로 이 앨범에 수록돼 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소라의 고집은 종종 기행으로 이어지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나는 가수다’ 촬영 당시 가수 김건모가 탈락하자 “내가 좋아하는 김건모가 탈락했다”며 방송에서 눈물을 흘린 사례다.

콘서트 도중 종종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관객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셋리스트의 곡들을 소화한 뒤 공연을 마치기도 했다. 한동안 온라인 게임 ‘와우’에 빠져 콘서트 직전까지 집에서 게임을 하다 매니저에게 끌려 나온 것도 전설적인 에피소드로 꼽힌다.

자신의 가수인생 서른살 생일을 자축하는 콘서트 ‘2023 이소라 콘서트 – 소라에게’(이하 ‘소라에게’) 공연을 앞두고도 이같은 기행은 이어졌다. 팬데믹 이후 4년만에 열리는 공연인데다 30주년이란 상징성 때문에 공연 티켓은 예매와 동시와 매진됐고 추가공연까지 개최됐다.

하지만 정작 가수 자신은 콘서트가 열리기 한달 전까지 자신의 30주년 공연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한다. 지금 사는 집에 이사한지 2년이 지났는데 공연 연습을 위해 집 밖에 나간 게 첫 외출이라고 했다.

9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소라에게’ 세 번째 콘서트는 이소라의 30년 음악세계와 더불어 음악을 대하는 그의 고집스러운 장인 세계까지 한눈에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초창기 그의 이름을 대중에 알린 ‘난 행복해’(1995), ‘처음 느낌 그대로’(1995), ‘제발’(2000)처럼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을 강타한 히트곡과 더불어 명반 ‘눈썹달’ 수록곡 ‘별’(2004), ‘듄’(2004), ‘티어스’(2004)까지, 이소라 음악세계가 약 100여 분에 걸쳐 집약됐다.

다만 이날 공연은 초반부터 음향에 문제가 생긴 듯 했다. 인트로부터 다소 인상을 쓴 이소라는 첫 곡 ‘난 행복해’를 부른 뒤 인이어에 문제가 생겼다고 스태프들에게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음악과 음향에 있어 손꼽히는 예민함을 자랑하는 이소라에게 결코 일어나서 안되는 사건이다.

30년간 그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의 기행도 지켜본 관객들은 이날 이소라가 별다른 멘트를 하지 않음을 직감한 듯 했다. 아마 다른 가수의 콘서트라면 환불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지만 ‘소리의 장인’ 이소라의 콘서트에서는 이조차 공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덕분에 어떠한 외부 개입없이, 마치 CD를 삼킨 것 같은 그의 음악세계를 논스톱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중략) /다음번엔 나같은 여자 만나지마 행복해야 해/넌 반드시 좋은 사람 만나”(난 행복해), “내가 사랑하면 사랑한단 말 대신 차갑게 대하는걸 알잖아/오늘 널 멀리하며 혼자 있는 날 믿어줘”(처음 느낌 그대로),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바람이 분다).

흡사 한편의 시에 운율을 붙인 것 같은 그의 아름다운 노랫말들이 클래식 공연처럼 고요 속에 펼쳐졌다. 과거 그의 소속사 이름이기도 한 ‘세이렌’(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님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노래로 수많은 남성들의 목숨을 앗아갔다)이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났다면 단연 이소라가 아닐까. 좌석에 앉은 이소라는 미동도 없이 준비한 곡을 부르는데 집중했다. 덕분에 그의 공연에서는 여타 K팝 가수들의 콘서트에서 흔히 보는 떼창, 환호, 기립박수 등을 들을 수 없었다.

총 14곡을 완창한 뒤에야 비로소 관객에게 첫 인사를 꺼낸 이소라는 예의 ‘음향문제’로 마음이 불편했다고 고백했다. 14곡을 쉬지 않고 부른 탓에 속삭이듯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다시금 그의 고집스러운 면모를 읽을 수 있었다.

이소라 자신도 다소 머쓱한 듯 했다. 그는 관객들에게 30주년 소회를 전하며 “예전에 공연과 방송을 병행할 때는 종종 내 마음대로 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 몸이 아픈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집에 머물며 가사 일을 내가 도맡고 있다. 집에만 머물다보니 과거 방송에서 했던 일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통 공연을 할 때 같은 옷을 입곤 하는데 이번 공연을 진행하며 집에 와서 옷을 벗어 제쳐놓았다. 그러면 팔순의,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가 옛날처럼 내 옷들을 주섬주섬 정리해주신다”며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가수 인생 30년동안 그의 공연 의상을 챙겨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고집과 기행으로 똘똘 뭉친 디바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듯 했다.

앙코르 곡이 없기로 유명한 이소라지만 관객에게 마음을 연 그는 “원래 제 공연이 ‘앙코르’가 없지만 이 곡을 같이 불렀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다리란 말만 하면서 외면했죠, 오랜 시간 조금 기다리면 그때가 올거라고”, 2004년 발표한 곡 ‘청혼’의 경쾌한 멜로디가 객석을 감쌌다. 긴 시간 이소라의 푸근한 한마디를 기다린 관객을 향한 최고의 청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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