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우리가 알던 심은경이 아니다. 걸쭉한 사투리를 쓰는 여고생도, 70대 노인의 성정을 입고 해맑게 웃던 앳된 스무 살도 아니다.
녹슨 창틀이 긁히는 듯 건조한 목소리로 사람 죽이는 것 따위 조금도 고생이 아니라는 말을 쉬이 내뱉는 사이코패스가 됐다. 말갛고 하얀 피부가 오히려 공포를 더 자극한다. tvN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하 ‘건물주’) 속 요나(심은경 분)의 얼굴이다. 흔한 악역에서 보여주는 근육질이나 사나운 분장, 문신도 없다. 덕분에 클리셰가 찢겨나간다.
작은 체구와 소녀의 인상, 전혀 위화감이 없는 외형에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말은 그로테스크의 정점에 있다. 폐차 프레스로 시신 처리를 지시하는 메마른 입술, 억압하는 상사를 잔혹하게 찌르는 무표정, 분노 속에서도 살인의 최적기를 계산하는 서늘한 눈빛까지, 심은경은 오직 표정의 깊이만으로 그 섬뜩한 이미지를 완성해 냈다.
데뷔 초부터 연기적인 칭찬을 받아왔다고 하나, 새롭게 도전하는 빌런마저도 우수하게 소화하는 건 확실한 재능이다. 열 살 무렵, 심각한 낯가림을 깨고자 연기를 시작했던 수줍은 소녀는 어느덧 20년 차 베테랑이 돼, 클리셰를 찢어발기는 잔혹한 빌런마저 완벽히 제 옷으로 소화해 내고 있다.
특히 4화 말미 상사 모건(미야비 분)을 제거한 뒤 다시 찾아온 사무실, 숨어 있는 김선(임수정 분)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요나의 텅 빈 눈동자는 엄청난 서스펜스를 끌어냈다. 자칫 작은 숨소리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극단적 상황, 심은경이 그려낸 요나의 무표정은 공기를 완벽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대본의 텍스트에만 갇히지 않은 심은경의 치밀한 캐릭터 설계에서는 경력 20년 차 베테랑의 내공이 느껴진다. 눈가에 붉은 음영을 더해 요나의 피폐한 분위기를 극대화한 메이크업과 오른쪽 셔츠 커프스에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레퍼런스 삼아 달아둔 눈동자 장식은 모두 심은경이 직접 제안한 디테일이다. 달팽이를 손수 구해주는 천진난만함과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광기라는 양극단의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심은경의 영리한 계산법이다.
이제 ‘건물주’는 절반을 돌았다. 적당한 코미디 시리즈일 것이란 예상을 깨고 우연이 그럴 듯하게 겹쳐지는 ‘삑사리의 미학’이 살아 숨 쉬는 스릴러 드라마다. 작가와 감독, 배우들을 비롯한 모든 제작진이 제 몫 이상을 다하는 마스터피스인 ‘건물주’에서 심은경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동감으로 일상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다. 악이 너무 강렬한 덕분에 눈을 뗄 수가 없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