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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때 배웠던 독일어가 이제야 겨우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프랑스어를 쓰는 발레(Valais) 주로 이동해야 했다. 다시 빨간 기차를 탔고 역시 멋진 녹색의 평원을 가르며 쥬릭(취리히)을 지나 한참을 가니 발레 주다. 여러가지 언어를 쓰는 나라는 재미있다. 국경을 넘어 다른 국가를 돌아다니는 듯한 즐거움이 있어 굉장히 이득을 보는 기분이다. 아펜젤에 있을 때는 뭐든 읽을 때 환절기의 잔기침처럼 “흐, 트, 크”하는 발음을 내야했지만, 지금부터는 혀를 보들보들하게 다듬고 코막힌 맹맹이 소리로 말을 한다. 발레에서 지낼 곳은 산중턱에 있는 생뤽(Saint. Luc). 아펜젤 바이스바트(Weissbad)에서 옮긴 곳이 이름조차 맨질한 ‘생뤽’이라니. 마치 미야자키에서 이틀을 묵은 다음 광저우로 순간이동해 “니하오”란 인사를 듣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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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브레렐리 당신 집은 어디입니까?
기차역이 있는 시에르(Sierre)에서 처음 간 식당에서부터 나는 깜짝 놀랐다. 메뉴판에서 독일어가 모두 사라진 것도 경이롭지만 영어조차 적혀있지 않다. 과일과 채소를 먹지 않는 내가 감각에 의존해 주문한 것은 결국 샐러드였지만, 역시 불어권 지역 답게 음식은 대체적으로 맛있다.
남서부에 위치한 발레는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상징으로 익숙한 마테호른 봉이 있고, 올 봄 백두대간 분천역(봉화)과 자매결연을 맺은 관문 마을 체르마트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평균 스위스에서도 해발고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그래서 웬만한 높은 봉우리마다 빙하(만년설)를 머리에 이고 있다. 360도 둘러봐도 울룩불룩 하얀 손가락이 사방에 솟아있다. 이곳에서 즐기는 하이킹이라니….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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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뤽에 있는 벨라톨라(Bella Tola) 호텔은 1859년에 지은 호텔로 굉장히 고풍스럽다. 무늬가 선명한 목재와 털가죽을 두른 인테리어도 스위스답다. 알프스의 높은 연봉을 바라보며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스파 테라스도 있다. 비치체어에 누워 바다가 아닌 2000m가 넘는 산을 바라보는 기분도 새롭고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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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산간마을인 생뤽에선 물레방아를 이용해 찧은 호밀로 빵을 만드는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커다란 스위스 전통식 호밀빵은 숯가마 오븐에 넣고 굽는다. 미리 숙성해놓은 반죽을 떼어내 모양을 만들기는 쉽지만, 정작 구워놓고 나니 좀더 잘 만들어 볼 걸하는 후회가 든다.
마을에는 몇개의 호텔 이외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어 어두워지고 나면 그다지 할것은 없다. 하지만 고요한 적막이 감도는 산속에서 다시 이처럼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잠들까 싶을 정도로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밤을 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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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찾은 스위스인의 생활
이튿날은 그리멘츠 계곡의 모이리(Moiry) 호수를 찾았다. 1958년에 댐건설로 산정호수가 되버린 모이리 호수는 터키석의 아름다운 빛깔처럼 그리멘츠 계곡에 떠억하니 박혀있다. 수많은 관광객을 태운 버스들이 아름다운 호수와 산을 보기 위해 주변으로 몰리고, 산길에는 지팡이를 든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푸른 하늘로 오르는 길을 누비는 곳이다.
이곳 인근에서 목동들의 생활을 체험할 기회가 생겼다. 파스칼 헤글러란 이름을 가진(그녀의 혈기 만큼은 80년대의 복싱챔피언 마빈 헤글러를 연상시켰다) ‘열혈’ 여성 산악인(스위스 알파인 이모션 소속)의 안내에 따라 댐으로부터 약 1시간30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된다.
저멀리 빙하와 호수가 겹쳐 보이는 계곡 위로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풀을 뜯는 소떼, 그리고 뭉게구름이 연출하는 풍경이 정말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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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덕에는 목동들이 치즈를 만드는 오두막집이 있는데 여기서 전통 방식의 치즈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몹시 흥미롭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매일 치즈를 먹어서였을까. 키가 180㎝는 족히 될 듯한 여자 목동이 치즈를 만들고 있었다. 커다란 통에 우유를 넣고 약한 불로 끓이면서 쉴새없이 저어주면 곧 우유가 몽글몽글 뭉치는 게 보인다. 예전에 국내에서 두부를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그 과정과 아주 비슷하다. 뭉쳐진 우유 덩어리는 부드러운 것이 정말 순두부처럼 생겼다. 꺽다리 여자 목동이 먹어보라며 치즈(아직은 우유덩어리)를 집어준다. 따끈하고 매끈매끈한 우유덩어리를 입안에 넣자 고소한 맛이 한가득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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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뭉쳐진 우유덩어리를 천에 담아 틀에 넣고 무거운 쇳덩이 뚜껑으로 누른다. 물기가 빠지면서 하얀 덩어리가 생겼다. 이것을 접어서 다시 눌러놓고 또 다시 누르기를 반복하다 보면 우리가 아는 둥그런 치즈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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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에 차려놓은 식탁에서 치즈와 빵, 햄, 육포 등 목동들의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앉아 있으니 평소 동경했던 낭만의 절반 쯤은 이룬 셈이다.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없었지만 낭만적인 초원에서의 하루를 보냈다는 만족감이 꽉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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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행, 아니 스위스에서 짧게 살아보기
아니베이 계곡(Val d’Anniviers)의 해발 1570m 부근에 위치한 그리멘츠 마을은 그림책에 나오는 마을처럼 생겼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새카만 목조주택들이 비탈에 가득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1999년 5월에 일어난 홍수로 인해 해발 1570m의 이 마을이 침수되어 일부 망가졌다고 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옛모습 그대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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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백포도주인 ‘빙하 와인’이 유명하다. 최고 80년 이상된 와인이 참나무통에 담겨 낡은 건물 속에 저장되고 있는데 이토록 귀한 와인을 연도별로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날 저녁 맛봤던 라클레트(Raclette)는 아주 특별한 미각을 선사했다. 커다란 덩어리 치즈를 전열기에 녹이다가 누룽지처럼 긁어서 접시에 담아주는 전통음식인데, 몇접시를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겁지겁 먹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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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과 발레를 오가며 보았던 ‘스위스의 속살’은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난 콘텐츠들로 가득했다. 그냥 사냥꾼과 목동이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심심산골이 아니었다. 아름답지만 거친 자연과 힘겨운 싸움을 거치며 살아가는 동안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룬 모든 것들이, 지금 스위스가 보여주고픈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되었으며 관광객들에겐 매우 훌륭한 볼거리와 먹거리, 체험거리로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단 며칠이지만 알프스의 어떤 봉우리보다 높이 세운 문화를 몸소 체험하며 그저 아름답기만 한 나라가 아닌 스위스에서 몇년 이상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발레(스위스) | 글·사진 이우석기자 demory@sportsseoul.com
●여행정보 문의=스위스정부 관광청 한국사무소(www.myswitzerlan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