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소녀들의 장난, 파멸로 치달은 집단 광기
복수의 신 소환, 미움엔 죽음만 남는다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현시대는 인터넷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클릭(Click)’ 한번으로 소통한다. 광범위한 분야에 한계 없이 정보를 얻고 개인 의견까지 자유롭게 공유한다. 하지만 ‘자유’라는 가면에 숨은 채 일명 ‘찌라시’에 정성을 쏟으며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기도 한다.
진실에는 관심 없다. 그게 무엇이든 문제의 시초가 된 ‘가짜 뉴스’에 타깃을 세워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누구 하나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과 같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따윈 개나 줘버린 추악한 현실. 연극 ‘시련’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만의 비열한 본능을 고발한다.
아서 밀러의 작품 ‘시련’은 17세기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마을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마냥사냥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마을의 소녀들이 숲속에서 춤추며 벌인 장난이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악마와 마녀를 색출하기 위한 재판이 열린다. 고발당해 법정에 선 이들은 아무리 부정해도 사형당한다.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타락한 인간들. 결국 파멸만 남는다.
‘시련’은 오늘날의 사회와도 깊이 맞닿아있다. 선(善)과 악(惡)이 무엇이든, 거짓과 선동이 지휘하는 사건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작품은 마녀사냥이라는 극단적인 집단적 광기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권력, 진실의 무게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부당한 권력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는 도덕성에 한숨만 짙게 남는다.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얼굴 없는 이름’들은 가명(닉네임) 뒤에 숨어 인간이 가진 추악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시시때때로 터지는 정치싸움, 스캔들, 여론 조작, 음모, 악플 등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 물론 이중 진실도 있지만, 무분별하게 줄줄이 터지는 ‘거짓’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 정신병의 근원지인 셈이다.

‘시련’은 공연 시작 전 잠시 암전됐다 한 번에 무대를 환하게 비춘다. 군더더기 없이 온통 흰색이다. 세일럼 마을의 목사 ‘사무엘 패리스’의 어린 딸 ‘베티’의 방에서 시작되기에 인간의 순수함을 조금이나마 표현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무대를 둘러싼 하얀 벽면은 마치 정신병동을 연상케 한다. 이후엔 인물의 심리와 급박한 상황을 조명색으로 나타내 몰입도를 높인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3명의 소녀. 이들은 전날 숲속에서 벌인 장난을 숨긴 채 거짓말을 이어간다. 심각할 정도로 진지해서 어른들마저 혼란에 빠진다. 이성을 잃은 ‘애비게일 윌리엄즈’는 당시 엄격했던 종교사회를 악이용해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장난으로 시작한 마을 소녀들의 놀이. 그 뒤에는 끔찍한 비밀이 숨어있다. 마을을 악마와 마녀에게 넘긴 이들의 위험한 장난으로 마을에는 악몽같은 시간만 흐른다. 사람들은 종교를 앞세워 마녀 척결에 나선다.
희생자는 특히 여성들이다. 악마를 봤다는(홀린) 소녀들의 말만 믿고 마을 여자들을 하나둘 잡아들인다. 악마의 혼령을 불러냈다며 첫 번째 마녀로 몰린 ‘티투바’와 마을에서 존경받는 ‘레베카 너스’가 있다. 여기에는 ‘애비게일’이 애초에 특정한 ‘존 프라터’의 아내 ‘엘리자베스’도 있다.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잡아들여 고문 후 교수형(살해)을 집행한다.
폭주하는 ‘애비게일’은 한때 흠모해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프락터’까지 악마로 몰아세운다. 법을 집행하는 ‘윗 분’들은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다. 그저 그를 없앨 명분을 만들고 싶어 한다. 제멋대로 뱉은 말엔 책임질 사람도 없다. 애증에서 애(愛)는 빠지고 증(憎)만 남은 하찮은 비극적 결말이다.
시대가 지났어도 우린 여전히 지옥에 살고 있다. 거짓을 양산할 땐 죄책감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될 대로 되란 식이다. 그러다 덜미를 잡히면 ‘그런가 보지’로 끝난다. 여전히 뱉은 말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없다.
한편, ‘시련’의 공연장에는 배우 지망생 또는 신인배우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작품에는 연기 경력 56년 차 주호성부터 ‘빵꾸똥꼬’ 진지희까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이들에게는 현실감 넘치는 생생한 배움의 현장이다. 관객들도 마을 소녀들의 기괴한 움직임과 괴성 탓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이니 이만한 ‘꿀빨기’도 없다.
세일럼 마을의 존경받는 농부이자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프락터’ 역 엄기준·강필석, 마을의 목사이며 권위와 명성을 중시하는 ‘패리스’ 역 박은석, 악마와 마녀를 찾아내기 위해 마을에 초청된 목사 ‘존 해일’ 역 박정복, 욕망을 이루고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애리게일’ 역 류인아,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메어리 워렌’ 역 진지희 등이 출연한다.
이와 함께 남명렬, 주호성, 김곽경희, 김수로, 권해성, 하준호, 신옥, 오종훈, 우범진, 박인선, 송민 등 23명의 배우가 180분을 광기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공연을 단 일주일만 남긴 ‘시련’은 오는 27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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