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 영화 ‘친구’의 한 대사.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착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을 상상해보자. 이 주인공은, 악당이 벌인 일로 굉장히 분노한다. 어쩔 수 없이 무력을 행사하게 됐다. 그런데 상대 뒤로 몰래 다가가 후두부를 가격한다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장면이다. 착하고 정의롭기 때문에 ‘당당히 정면에서 적과 마주해’ 본인도 큰 상처를 입어가며 처절하게 싸우는 것이 오히려 떠올리기 쉬운 설정이다. 그럼 반대로 비열하고 잔인한 악당이라면?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 몰래 다가가 주인공의 뒤를 덮치는 전개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도 괜찮다. 결국 마지막에는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 한들 정의의 주인공이 승리하고 비열한 악당은 심판을 받게 되니까.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호신술을 써야할 상황이 됐을 때 절대 착하고 정의로우면 안 된다. 나를 위협하는 상대만큼 비열하고 잔인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진행하는 무술 수업 때 한 수련생이 기술을 아주 매끄럽게 연결해 상대의 뒤를 잡았다. 팔꿈치로 상대의 후두부를 때려 순식간에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상황. 그런데 이 수련생은 다시 상대의 몸을 굳이 돌려서 앞부분을 공격했다.
연습을 멈추게 한 뒤 왜 바로 후두부를 공격 안 했는지 물었더니 “상대가 너무 크게 다칠 수도 있고, 또 뒤에서 공격하는 게 너무 비겁해보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초등학생 수련생이었는데 위의 내용과 비슷한 상황이 됐다. “뒤 잘 잡았어. 이제 팔꿈치로 머리 뒤쪽을 공격할 수도 있어”라고 알려줬더니 이 수련생은 상대를 잡은 팔을 풀더니 “너무 잔인해요, 선생님”이라며 불만 어린 표정으로 필자를 바라봤다.
앞서 칼럼에서 다뤘던 주제인 ’눈찌르기’나 ‘급소 공격하기’를 연습할 때도 이런 상황은 반복된다.
두 번 다 필자는 그들에게 “너무 착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 말을 칭찬으로 들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고민해보자. ‘잔인하고 비겁해보여서’라…. 그렇다면 과연 당신에게 못된 짓을 하려는 상대도 그런 제한을 두고 당신을 덮쳐올까? ‘하지만 설마 이런 짓까진 하진 않겠지’란 방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일상이 파괴되었는가.
최근 가슴아픈 사건이 있었다. 한 남성이 자신을 데이트폭력으로 신고한 여자친구를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것이다. 피해자인 여성은 지하주차장에 숨어 기다리고 있던 남성에게 이렇다할 반항도 못 해보고 목숨을 잃었다.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이, 흉기까지 챙기고, 몰래 숨어서 자신을 해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상황. 이 때가 바로 ‘호신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비겁한 기술’, ‘잔인한 기술’을 따지다가는 이미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게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방법과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또 그만큼 굳은 심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다, 지금은.
노경열 JKD KOREA 이소룡(진번) 절권도 대한민국 협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