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예술가’ 동림·향안 노래…예술로 품은 행복만 기억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진 예술가와 산다는 건 어떤 삶일까? 푸른 들판이 펼쳐진 평온한 전원생활 속 느긋한 책 읽기, 잔잔한 강물의 흐름에 따라 붓을 휘감는 그림 그리기? 실제 두 예술인과 결혼했던 한 여인은 이와 정반대로 많은 의미의 눈물로 답변을 대신한다. 행복했던 시간보다 외롭고 쓸쓸했다. 하지만 그는 찰나의 행복을 기억하며 사는 게 전부라며 미소 짓는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수필가·미술 평론가·화가이자 시인 이상과 추상 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생애를 그린다. 작품명은 그가 남긴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라는 문구에서 영감을 얻었다.
작품은 ‘천재 시인’ 이상과 사별한 ‘동림(변동림, 김향안의 본명)’과 김환기 화백과 여생을 함께한 지금의 ‘향안’의 삶을 교차하며 역순으로 흐른다. 그 시간 속에서 ‘동림’과 ‘향안’은 서로를 위로하며 ‘사랑’을 ‘사람’ 아닌 ‘예술’로 승화한다.

◇ 이념의 회로까지 멈추는 순수한 사랑
그를 사랑할 때의 순간은 사랑을 속삭이는 맛집과 같다. 나를 완성하는 그림과 시는 다시 예술가를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져 축복이 된다. 함께 꿈을 키워가는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당신의 꿈도 응원한다. 나만이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지지자가 된다.
사랑 앞에선 지금까지 지녀온 이념의 회로가 고장 난다. 풋풋한 첫사랑의 설렘, 내가 바라던 이상.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다. 뇌가 멈추니 마음마저 병든다. 그만하라고 소리치지만 멈출 수 없는 예술에 대한 갈망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경지에 오르기란 욕심이 앞서고, 이는 이상과 달리 생이별로 이어진다. 하지만 ‘향안’은 시와 그림으로 남긴 그들과의 추억으로 살아간다.
단순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서로를 응원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해와 배려, 상대의 세계관까지 보듬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서 이름까지 그를 따르면서 온전히 가슴에 품는다.

◇ 한 폭의 수채화가 전하는 무지갯빛 실화
예술가의 삶 ‘라흐 헤스트’는 나쁜 것부터 말하면 ‘절망’, 후에 좋은 것을 말하면 ‘희망’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점과 선으로 연결된 무대는 마치 수채화 한 폭을 보는 듯 ‘동림’과 ‘향안’의 시간 속으로 이끈다. 감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파스텔톤의 무지갯빛 만남과 이별, 즐거움과 외로움, 설렘과 분노 등 어느 상황에서든 그 시점의 한 사람을 향한 무한 사랑을 속삭인다.
그와의 나눈 향기, 풍경, 음악 등 화려하진 않지만, 시간이 흘러도 엊그제 겪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이 감정은 그들만이 아는 것에 지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잔잔한 여운으로 남긴다.
빗방울을 세고, 빗소리를 모차르트에 비유하는 낭만도 있지만, “같이 죽자, 먼 곳으로 떠나자”고 제안하고는 혼자 동경으로 떠나버리는 남자를 보고 아픈 가슴을 쥐어짠다. 빗소리 들으며 따뜻한 커피를 떠올리다가도 막걸리가 당기는 대목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술가와 산다는 건 ‘금쪽이’를 데리고 사는 것 같다. 하지만 ‘동림’은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한다.
상처로 물들었지만, 다시 예술가를 사랑해도 되겠냐는 ‘향안’에게 ‘동림’은 얘기한다. “이 사랑을 응원한다”고. ‘동림’과 ‘향안’은 그들과의 여정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예술가’가 된 것이다.
사랑의 상처를 다시 예술로 치유받는 ‘향안’ 역 이지숙·최수진·김려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잠시 붓을 내려놓을 줄 아는 화가 ‘환기’ 역 김종구·윤석원·박영수, 희생도 사랑이라 말하는 ‘동림’ 역 홍지희·김주연·김이후, 자유로운 영혼의 시인 ‘이상’ 역 변희상·최재웅·임진섭이 무대에 오른다.
사랑과 이별의 흔적을 아름답게 그린 ‘라흐 헤스트’는 오는 6월15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1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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