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는 지극히 한국적 정서를 담은 드라마다. 때문에 시대극이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란 우려가 일부 있었다. 대본, 연출, 배우들까지 힘을 줬기에 완성도가 높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뚜겅을 열어보니 확연히 달랐다. ‘용두용미’였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에 가서 흐지부지되는 용두사미 극과 궤를 달리했다.
수미상관이다. 처음과 끝이 완벽하게 조응했다. 광례(염혜란 분)가 등장하며 1막 초반부를 끌고 갔다. 잠녀로 29살에 요절하고, 애순이 혼자 남겨졌다. 이따금 꿈에 나오기는 했으나, 그게 다일 것만 같았다.
그러다 최종 16회에 ‘클로이 H.리’로 등장한 장면은 충격을 넘어 전율을 일으키게 했다.
“이 좋은 세상, 다시 좀 태어났어? 그 원하던 책상에 좀 앉아서 ‘여봐라’ 좀 하고 살지”라고 노년의 애순(문소리 분)이 제주 바다를 보고 읊조렸다. 그때만 해도 ‘설마’하고 봤다. 책상을 비추고 이윽고 얼굴 타이트샷이 잡히는 데 아니나 다를까 광례, 아니 염혜란이 화면에 등장했다.

환생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보지 못한 광례는 유학까지 다녀온 번듯한 ‘펜쟁이’가 돼 있었다. ‘바당꽃’이라는 출판사는 또 어떤가. 바다라는 제주어 ‘바당’에 이 시리즈 전체를 휘감는 ‘꽃’의 합성어다.
‘클로이(Chloe)’라는 영문명도 의미심장하다. 그리스어로 ‘푸른 새싹’을 의미한다.
금명(아이유 분)의 내레이션에서 “나는 그들(관식과 애순)의 꿈을 먹고 날아올랐다. 꿈을 씨앗처럼 품고”라고 했다. 씨앗을 땅에 심고 꽃을 틔우는 것처럼 시인이 꿈이었던 애순의 씨앗은 노년이 되어 활짝 폈다. 새싹(‘좋은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클로이가 편집장으로 있는 출판사에서 시집(‘폭싹 속았수다’)을 출간하며 꽃으로 만개한 것이다. 공장에서, 시골에서, 대학 문턱 앞에서, 사라진 수많은 꿈 많던 문학소녀들의 그 꿈을 자식 금명이가 아닌 애순이가 직접 해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특초밥 먹여주고 싶다는 애순의 바람은 출판사 직원이 포장해 온 종이 가방에 담겼다. 더 이상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다. 취미로 스쿠버 다이빙을 즐겼다. 바다 앞 웻슈트를 입고 활짝 웃는 클로이의 사진 한 장으로 이를 대변했다. 1회에 써 내린 신파적 서사가 16회에 가서 완벽하게 하이 파이브를 하며 전율의 순간을 선사했다. 왜 우냐고 묻는 직원 질문에 “장해”라는 말로 애순의 일생을 정의 내릴 땐 말도 못 할 쾌감에 눈물이 주르륵 나올 수밖에.

관식(박보검·박해준)이 선사한 서사도 광례 못지않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애순을 향한 순애보적 사랑은 판타지 아니냐는 일부 시선도 있었으나, 오히려 그 시절 드러나지 않은 숱한 관식이를 대변하는 것에 가깝다. 1990년대 드라마(‘사랑이 뭐길래’ ‘그대 그리고 나’)에서 상길(최대훈 분)과 같은 남성성 넘치는 캐릭터만 주목받았기에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관식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희생해야 했다. 아파도 참고, 고통이 몰려와도 인내했다. 때로는 모욕적인 말로 시기 질투를 들어도 속으로 삭혔다. 그로 인해 노년에 병에 걸려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 자연스레 이해됐다. 광례가 그랬던 것처럼 관식도 삭아서 없어지는 버팀목이 되어 애순과 금명이 온전히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날 수 있게 한 것이다.
광례와 관식 모두 병에 걸려 숨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광례와 관식이 지지해 준 힘을 바탕으로 핍박받은 K-며느리 애순과 양보하고 살아가야 했던 이 땅의 K-장녀 금명이 태풍과 모진 비바람을 끝내 떨치고 일어나 꿈을 이루게 되는 걸 작가는 보여주려 했다.

일각에서 비판하는 가족주의 판타지에 여성을 소비한 드라마가 아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여성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한국의 서사를 반대 지점에서 풀어냈다. 이를 남성 중심주의로 답습하지 않기 위해 제주와 여성이라는 소재 위에 광례를 처음과 끝에 놓았다. 관식은 이야기 중심부에 놓고 가부장제에 반대되는 삶을 산 인물로 묘사했다. 대척점에 ‘학씨’ 상길을 놓고 대조군을 명확히 한 것도 이런 의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토록 설득력 있게 모든 걸 배치한 드라마라니. 무릎을 칠 수밖에.
임상춘 작가, ‘폭싹 속았수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