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첫 미팅 때 설경구 선배랑 7시간 동안 물만 먹으면서 대화했어요. 대본을 펼쳐보고 리딩한 것도 아니었어요.”

영화 ‘보통의 가족’에 수현이 캐스팅된 건 설경구 제안이었다. 돈을 잘 버는 변호사 재완이 재혼한 와이프 지수에 어울릴 만한 배우로 어울릴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허진호 감독 주선으로 곧장 만남이 이뤄졌다. 첫 만남에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헤어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뭐라고 부를 거 같아? 여보? 자기?”

허 감독 질문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특유의 “흐흐”하는 웃음과 함께였다.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관한 의논이 오갔다. 7시간이 물 흐르듯 흘렀다.

수현은 “그렇게 얘기하고 밥까지 먹었으니 더 길게 있었다”고 웃어 보이며 “전혀 지겹지 않았다. 감독님이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고민하는 걸 느꼈다. 영화에 미쳐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니까 오히려 힘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밥을 먹다가도 또 시작됐다. 재완-지수 부부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배우를 붙들고 너덧 시간을 토론하는 허 감독이었기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수현은 “감독님은 진짜 겸손하신 분이다. ‘네 생각은 어때’가 항상 담겨 있다. 모니터를 함께 보는 것도 거부감이 없고, 계속 수정을 거듭하신다”며 “연기에 있어서도 배우에게 시간을 더 할애해 주기에 연기하기 편했다”고 말했다.

‘보통의 가족’은 살인 사건을 다룬다. 그것도 자녀가 키득거리며 노숙자를 발로 무참히 밟아 죽였다. 목격자가 없다. 부모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아이들이 법의 심판대에 오를지, 묵인하에 평생을 묻고 갈지 정해진다.

반전은 여기서 나온다. 소아과 의사인 재규와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는 연경, 변호사 재완까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들은 아이들의 의견보다 자신의 처지를 우선한다. 난상 토론이 벌어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왜 아이들 생각은 궁금해하지 않아요?”라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건 지수다.

영화는 초반, 카메라는 한강이 보이는 펜트하우스를 트래킹하며 들어간다. 몸에 붙는 핑크색 타이즈를 입고 기구 필라테스를 하는 지수는 장면만으로도 자극적이다. 몸매에만 신경 쓰고 생각 없어 보일 거란 편견이 생기게끔 만든다. 지수는 재완 변호사 사무실에 떡 배달을 갔다 눈이 맞아 결혼했다는 전사(前史) 역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네 인물 가운데 식자층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기에 지수가 던진 정상적인 질문은 셋을 얼얼하게 만든다.

수현은 “지수가 마인드가 건강한 사람이다. 가장 ‘보통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며 “흰색 옷을 입고 계속 등장하는 것도 때 묻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재완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듯 띠동갑 연하인 와이프와 결혼했다는 설정도 더했다. 수현은 “(전시하고 싶은) 트로피 와이프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며 “자기관리에 신경 쓰는 여자로 보이기 위해 필라테스하는 장면도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런 반전이 가능했던 건 막힘없는 대사 처리 덕분이었다. 설경구, 장동건, 김희애라는 내로라하는 선배들과 ‘디너신’은 팽팽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지수 대사가 부조리극 화룡점정이었다.

“말하는 타이밍이 쉽지 않더라고요. 잘못하면 발 연기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너무 세지도 않으면서 확신이 없으면서 말하는 대사를 해야겠다는 게 저와 감독님이 가진 초점이었어요.”

연경(김희애 분)과 화장실에서 주고받은 은근한 신경전도 토론토영화제에서 화제였다. 지수는 “희애 선배님과 어떻게 할지 다들 궁금해했다. 과연 안 지고 잘할 수 있을까 했다”며 “현장에서 ‘와, 세다’는 리액션도 해봤고, 무섭게 덤비기도 했다. 대본대로 하지 않고 느낌대로 했는데 자연스럽게 잘 나온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