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러브스토리
코미디가 로맨스로 변모하는 순간의 감격
2차원 평면을 3차원 공간으로 재현
배우별 매력 포인트로 ‘회전문’ 욕구 충만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수많은 작품 중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5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연애 비극이다. 집필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살로 추정. 혈기 왕성하고 열정 가득했던 인간 셰익스피어의 사랑은 어떠했을까? 두 인물의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그의 이야기는 아닐까, 작품에 조심스럽게 상상을 더 한다.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1998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영국의 리 홀 작가에 의해 2014년 연극으로 탄생했다.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대성공을 이룬 후 미국··캐나다·일본·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각국의 무대에 올라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2023년 초연 후 2년 만에 다시 관객들을 찾아왔다.
작품은 희극에 깊숙이 묻어뒀던 셰익스피어의 첫사랑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을 그린다. 이는 영화로 첫선을 보인 마크 노먼 작가와 톰 스토파드 극작가의 유쾌한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1593년 런던, 연극 대본을 쓰다 슬럼프에 빠진 셰익스피어는 부자 상인의 딸 비올라 드 레셉스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가난한 귀족 웨섹스 경과 정혼한 상황.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은 남장하고 극단에 들어온 비올라의 연극을 향한 열정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존경심으로 다시 연결된다. 그렇게 코미디극이었던 ‘로미오와 에델, 해적의 딸’은 애절하고 비극적인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다.
작품 곳곳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과 ‘말괄량이 길들이기’, ‘십이야’ 등이 숨어있어 또 다른 재미와 매력을 선사한다.

◇ 코미디→로맨스→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셰익스피어의 첫사랑일까?
셰익스피어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지만, 가난하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이 주신 능력을 허비한다. 그렇다 보니 집필 진행 속도가 더디고 열정도 점점 식어간다.
작품엔 관심 없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웃음을 위해 의미 없는 대본만 쓴다. 하지만 그의 앞에 비올라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게 변한다. 코미디로 시작한 저술 의도는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와 그의 친구 키트 말로우로 인해 로맨스로 변모한다.
비올라와의 비밀 연애는 달콤하고 짜릿하다. 남몰래 하는 사랑은 항상 불안하지만, 이러한 자극이 두 남녀의 사랑을 더욱 불태운다.
일상이 연극이 된 셰익스피어와 비올라. 현실의 벽이 이들의 행복을 가로막는다. 당시 관객들은 그저 웃고 즐기는 코미디극을 원했다. 무엇보다 여자에게 무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벼랑 끝에 몰린다.
슬픔에 빠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에델, 해적의 딸’은 코미디에서 로맨스, 마지막 순간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다.
장르가 완전히 바뀌었지만, 사랑을 좇은 비극의 여주인공은 같다. 살아서 함께 할 수 없다면 같이 죽음을 맞이해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로미오’ 셰익스피어와 ‘줄리엣’ 비올라의 진심이 극 속에 그대로 스며든 것이다.
남장해서라도 무대에 오르고 싶었던 비올라는 극적인 순간 불변의 룰(Rule)을 깨고 여주인공 ‘줄리엣’으로서 당당히 관객 앞에 선다. 연극과 남자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반기를 든 것이다.
연극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는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 비올라는 관객들 가슴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쉰다.

◇ 진정한 사랑으로 인한 심정 변화…예술은 심금을 울린다
셰익스피어와 비올라의 애틋한 사랑은 예술로 승화된다. 이는 연극의 가치를 모르던 엘리자베스 여왕과 귀족들의 저렴한 인식을 바꾼다.
여왕만을 위한 연극에는 무조건 개가 등장한다. 여왕이 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실제 무대를 이끌 똑똑한 동물을 섭외가 어려워 사람이 개가 돼 무대에서 짖고 구르며 재롱을 부린다. 배우라면 어떠한 역할이라도 가능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인간성을 배제한 것. 연극을 예술로 보기보단 그저 여왕을 웃겨줄 바보들을 원했다. 코미디극이라고 하지만 서커스에 가깝고, 배우는 그저 여왕을 위한 광대일 뿐이다.
여왕은 셰익스피어에게 웃음보따리가 아닌 진정한 러브스토리를 연극으로 확인시켜달라는 제안을 한다. 아니 50파운드 내기를 건다. 당시 이 금액은 여섯 채의 집을 살 수 있었다. 배경이 런던이니 지금의 강남 집값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예술을 흥정하는 건 지금이야 몰상식한 자들이라고 비웃겠지만, 당시엔 그저 웃고 즐길 거리였다. 이러한 무례한 개념을 셰익스피어가 뒤집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여왕의 분별력에 변화가 생긴 것. 연극은 더 이상 이를 비판한 자들의 재롱잔치가 아닌 예술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왕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 셰익스피어와 비올라의 사랑은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관계를 극작가와 배우로서 받아들인다. 비올라와 현실 부부로 살아야 하는 웨섹스 경은 그를 셰익스피어가 아닌 연극에 빼앗긴 것이다.

◇ 16세기 런던 극장을 그대로 옮겨…영화를 연극으로 극대화한 무대 장치
최근 한국 공연계는 무대에 많은 지분을 투자한다. 극의 시대적 상황부터 인물의 심리까지 표현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화려함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기 위한 장치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군더더기 없이 목재로만 꾸몄다. 대신 360도 회전하고 앞뒤,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간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상황에 따라 같은 듯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장면을 볼 수 있다.
제작사 ㈜쇼노트는 실제 원목을 사용해 16세기 런던 글로브극장과 당대 극장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그대로 옮겼다. 그 시대의 극장들이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하는 목재 배경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작품이 극중극 구조라는 점도 강조하기 위한 노력도 내포돼있다. 회전무대를 최대한 활용해 무대 위와 뒤의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 중 하나로 쓰인다. 전반적으로 무대와 일상의 안팎을 의미해 빠른 장면 전환을 꾀한 것이다.
승강무대와 전동무대를 통한 예술적 요소도 더한다. 예를 들어 무대 아래에서 올라오는 술집, 사공이 배를 몰고 가는 물결에 따라 건물이 흘러가는 등의 시각적 효과로 원근감을 표현한다. 연극 무대라는 2차원 평면을 3차원 공간으로 재현해 거리감과 깊이감을 담아낸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영화를 위해 탄생한 작품을 연극으로 옮겼다. 영화를 연극으로 각색한 것이기에 무대 위에서의 스피드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연극 대본을 보면 장면 하나가 두 페이지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관객들이 원작의 속도를 어렵게 따라가지 않기 위해 시어트리컬리즘을 적극 활용해 연극의 본질을 강조했다. 무대 장치에 힘을 줘, 집에서 OTT를 감상하듯 쉽고 편안하게 볼 수 있다.

◇ ‘셰익스피어’ 역 이규형·손우현·이상이·옹성우, 4인 4색 매력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배우들의 연주와 노래로 배경음악을 대신해 뮤지컬 같지만 연극이다. 유모가 가끔 노래로 대사를 대신하지만, 이는 추임새일 뿐이다.
무엇보다 작품의 키포인트는 정반대 분위기의 1막과 2막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1막은 코미디극이다. 비올라에게는 정열적인 직진남 셰익스피어 역 배우들의 대사가 애드리브인지 대본인지 헷갈릴 정도로 빵빵 터진다. 몸 개그도 서슴지 않아 관객석은 웃음바다다. 반면 2막은 셰익스피어와 비올라의 추억과 기억 그리고 미래를 꿈꾸는 상상을 통해 로맨스 극으로 완성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자칫 웃음에 묻혀 작품의 메시지를 잊게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연출진과 배우들이 무대 준비과정에서부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이때 재미와 감동이 조화를 이뤄야 작품의 풍미를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역 이규형·손우현·이상이·옹성우는 대본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선을 지키며 웃음과 감동의 비율을 적절하게 표현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1막에서는 위트있고 고급스러운 유모를, 2막에서는 비올라와의 관계에 깊이를 더해 자연스러운 감정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인터미션 때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작품을 감상한다면 배우들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4인 4색의 셰익스피어를 회전문으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들이 표현하는 인물의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이규형을 아직 ‘해롱이’로 기억하는 관객이 있다면, 베테랑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신줄 잡은 또 다른 ‘해롱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적인 진솔한 셰익스피어를 원한다면 로맨티스트 손우현의 공연을 추천한다. 그만의 애정 표현과 편안함으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에너지와 기세로 무대에 오르는 이상이의 무대에서는 남성미를 느낄 수 있다. 정열적인 사랑을 과감하게 표현해 ‘심쿵 포인트’를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작품으로 연극에 데뷔한 옹송우에게서는 풋풋함이 묻어난다. 그의 성장과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사랑만으로 천재성을 되살린 셰익스피어가 무대에서 써나가는 가슴 설레는 러브레터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오는 9월1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