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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위원석 체육1부장]이유성(59)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은 국내 체육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으로 손꼽힌다. 그는 탁구선수로서 국가대표 상비군까지만 지냈으니 이른바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아니었지만 지도자로 입문한 뒤 특유의 카리스마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탁구를 대표하는 명장 가운데 한명으로 우뚝 섰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렸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인 ‘코리아’의 여자팀 코치로 출전해 만리장성 중국을 넘어 세계 정상에 올랐던 것은 그의 개인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지만, 분단이후 남북을 통틀어 ‘코리아 스포츠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대한항공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4년만인 2006년에 임원으로 승진한 것도 국내 순수 경기인 가운데는 당시 두번째였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별을 한번 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는 그해 대한항공 스포츠단의 단장직에 올라 지금까지 만 10년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또한 경기인 출신으로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는 현재 대한항공 스포츠단의 수장으로 남자프로배구팀,여자탁구팀,스피드스케이팅팀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스포츠단 단장 취임 10주년을 기념해 지난 체육인생을 한번 되돌아보자는 필자의 제안에 그는 처음에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고사의 뜻을 밝혔다. 이 단장은 “지난 해부터 어떻게 (지금 자리에서)멋지게 마무리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대과없이 체육계에서 일을 해왔는데 흠결없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다. 내가 자리를 잘 물러나야만 후배들에게 더 좋은 길이 열린 것이라는 책임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이라면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지난 체육인생을 한번 정리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해 어렵게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았지만 그 이후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이 뜻하지 않게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생겼다.
인터뷰가 예정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자는 당초 인터뷰 취지대로 ‘체육인 이유성’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자고 거듭 약속한 끝에 지난 12일 서울 김포공항 인근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그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선수 코치 감독 단장을 두루 거친 ‘체육인 이유성’의 이야기를 한번 되짚어보기로 하겠다. 우선 탁구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떻게 처음 탁구와 인연을 맺게 됐는가.서울 마포에 있는 공덕국민학교를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저런 운동을 꽤나 잘했다. 한데 6학년때 조회 시간에 친구 한명이 탁구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표창장을 받는 것을 봤다. 부럽기도 하고 나도 운동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 경쟁심도 생기고 해서 바로 (탁구장에서)붙자고 했다. 막상 대결을 해보니 게임이 안됐다. 나랑은 차원이 달랐다. 그 친구에게 탁구를 배웠다. 그러다가 탁구부가 있는 배재중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탁구부에 들어갔다. 탁구를 열심히 하다보니 성적이 떨어졌고 부모님이 탁구부에 있는 것을 반대하셨다. 당시 배재중 탁구부가 군기가 셌는데 (부모님 뜻대로)탁구부를 나가겠다고 했더니 ‘빳다’를 백대 맞으면 나가게 해주겠다고 하더라. 15대를 맞으니 백대는 죽어도 못맞겠더라. 그래서 탁구부에 남았다.
배재고에 진학했는데 1학년때 탁구부가 해체됐다. 그래서 당시 대한탁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김창원 신진그룹 회장이 운영하는 신진공고로 전학을 갔다. 신진공고에는 국가대표선수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중에 세계를 제패한 이에리사 정현숙 등이 훈련을 했고 우리는 그들의 훈련상대를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신진공고는 탁구선수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국가대표랑 함께 훈련을 하니 당연히 실력이 늘었고 졸업뒤 신진그룹내 한국기계가 운영하는 실업팀에 창단멤버로 들어갔다. 이 팀이 3년뒤에 대우중공업으로 인수됐다.
-선수 시절에는 국가대표 상비군까지만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른바 스타 출신 선수는 아니었다는 얘기인데.(크게 웃으면서)운동을 잘했고 재주는 많았는데 그런 것만 믿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이 부족했다. 신진공고를 졸업하고 한국기계에 입단한 우리 동기들이 운동 능력은 좋았지만 솔직히 노는 것도 좋아했다. 담배인삼공사 고수배 감독이 그때 동기였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하지 못했고 현역을 모두 일찍 그만뒀다. 조금만 더 했으면 바로 대표선수까지 되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런 (선수시절)경험이 나중에 지도자가 됐을 때 좀더 독하게 선수들을 몰아세우는 동기가 됐던 것같다.
-그러다가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고 나중에 한국탁구를 대표하는 명장중의 한명으로 올라서게 된 것인데.한국기계 실업팀에 있으면서 경기대에 적을 뒀는데 학점이 모자라 1학년이 끝나고 영장이 나와 군대에 가게 됐다. 당시 군체육부대에서는 공군만 탁구단이 있었다. 그래서 성무단(공군)은 대부분 대표급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했다. 성무단에 들어가니 축구 황재만이 동기였고 차범근 선배가 한기수 위였다. 성무단 탁구선수는 태릉에서 영외거주를 했기 때문에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탁구단에 감독 코치가 따로 없어서 주장이 그 역할을 했는데 입대 일년반뒤에 내가 주장이 됐다.
제대뒤 (한국기계를 인수한)대우중공업에 복귀했는데 무릎 부상이 있었다. 대우 감독을 맡고 있던 이상국 선배가 경기를 뛸 수 없으니 월급은 받으면서 명지여고 아이들을 좀 봐주라고 권유했다. 그게 인연이 돼 신설팀인 명지여고 탁구단을 맡게 됐다. 당시 서울여상 동덕여고 계성여고 등이 탁구명문이었는데 24살의 나이에 아이들을 가르치며 대회에 출전해서 마구 깨지니 내 스스로가 못견디겠더라. 밤에 분해서 잠이 안왔다. 아마도 선수 시절 느끼지 못했던 근성이 다시 살아난 것같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독하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밤중을 넘어 새벽까지 훈련하는 날이 늘어났다. 이렇게 맹훈련을 시키니 3년만에 명지여고가 정상에 올랐다. 이때 첫 졸업생이 6명이었는데 나에게 엄청나게 많이 혼났다. 지금도 이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하도 선수들을 엄하게 훈련시키고,대우에서 받은 월급으로 아이들 밥값이니 청소비니 이런 것들을 다 부담하고 극성을 떠니 내 별명이 ‘부교감’이 될 정도였다.
신설팀에서는 모든 선수들이 스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에이스 몇명을 키우면서 다른 선수들에게는 팀을 위해 희생을 요구했다. 이런 것이 다 조화를 이뤄 3년만에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이 애들이 졸업할 때가 됐는데 신탁은행에서 코치직을 제의했다. 그런데 조건이 고3 에이스 두명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신탁은행은 이에리사 정현숙이 뛰었던 팀이었고 어마어마한 직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명문팀의 코치직이 탐이 나서 달랑 두명만 데리고 가면 나머지 4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이 아이들에게 팀을 위한 희생을 요구했는데 (취업을 하는 단계에서)두명만 데리고 가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더라. 그래서 거절을 했다.
당시 박성인 감독님이 삼성을 맡으면서 국가대표 사령탑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나보고 대한항공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대한항공이 에이스 2명에 추가로 2명을 받아주는 조건이었다. 박 감독님이 삼성에 한명을 입단시키고 한일은행에 있던 박도천 선배가 한명을 받아줬다. 그렇게 6명 졸업생을 모두 취업시켰다.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이 아이들은 내가 첫정을 준 놈들이었고 내 새끼같은 놈들이었다. 피와 살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선수들에게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지도자로서의 철학이 드러나는 에피소드같다. 그렇게 대한항공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겠다.처음부터 내가 제자들과 같이 대한항공에 간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친아버지처럼 존경하는 당시 명지여고 양근석 교장선생님이 내 열정에 반해서 이곳에서 체육교사를 하라고 만류했다. 나도 학교에 남을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대한항공에 입단했던 제자들이 6개월뒤 울면서 나를 다시 찾아왔다. 당시 지도자가 열의가 없고 운동도 제대로 안시켜서 도망을 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피땀 흘려 가르쳤던 아이들이 그런 처지가 되니 속이 상했다.
결국 대한항공에서 선수들을 명지여고로 보내서 내가 코치를 해주는 것으로 정리됐다. 이후 3년동안 명지여고에서 학생선수들과 대한항공 선수들을 같이 가르쳤다. 명지를 졸업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대한항공에 입단하게 됐다. 이렇게 하다보니 명지여고와 대한항공이 한 팀처럼 운영되는 모양새가 됐다. 어차피 다 내 아이들이 된 것이다. 대한항공과의 인연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됐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
-정성을 다한다는게 현장 지도자로서의 철학이었겠다.그렇다. 선수들에게는 모든 정성을 쏟아야 한다. 정성은 단지 훈련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안의 어려움도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겠다는 그런 자세와 마음이 중요하다. 이런 정성이 있으면 결과가 따라온다. 물론 지금 되돌아보면 내 지도 스타일이 부끄러웠던 부분도 많다. 그때는 정말 아이들을 많이 혼냈다. 지금 시대의 기준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나를 인정해줬다. 내가 그들을 혼내는 것도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것이 정말 고맙다.
요즘 스타출신 감독들에게 아쉬운 부분은 자기 생활이 우선이고 선수들에게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것같다는 점이다. 선수시절에는 탁월한 자질로 좋은 성과를 냈던 스타출신 지도자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열정은 부족한 것으로 보여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나는 지도자 시절 동안 사생활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을 선수들에게 쏟아부었다. 선수들을 독하게 다루고 연습량도 무지하게 많았다. 그렇게 하다보면 중요할 때 (선수들이)고비를 잘 넘겼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너무 가혹하게 한 것도 있는 것같아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탁구계에서 라이벌이기도 하고 형제같기도 한 강문수 감독(현 국가대표팀 총감독)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데.아까 말한 것처럼 군입대를 앞두고 탁구를 계속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 강문수 선배가 마침 공군팀의 주장이었다. 강 선배의 적극적인 권유로 공군팀에 들어가게 됐고 그것이 긴 인연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강 선배도 부상으로 현역 생활을 오래하지 못했고 삼성팀이 창단할 때 남자팀 코치로 갔다. 내가 명지여고에 있을 때였다. 현역 시절은 서로 화려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둘이 일찍 지도자로 나섰고 공교롭게도 남녀로 갈렸다. 나중에 강 선배는 남자탁구의 수장이 됐고 나는 여자탁구에서 그런 역할을 하게 됐다. 둘이서 태릉선수촌에서 남녀 대표팀 지도자로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둘다 열정이 넘치다 보니 한마디로 태릉이 시끄러웠다(웃음). 그 형은 남자가 우선이고 나는 당연히 여자가 우선이다 보니 툭하면 붙었고 싸웠다. 여자대표팀은 남자선수가 연습 상대를 해줘야 하는데 강 선배가 배려를 잘안해줘서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워낙 세게 싸우는 일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같으면 서로 원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경쟁 의식을 가지면서도 우정을 유지했고 그런 시너지효과로 남녀 대표팀이 서로 잘됐다. 아마도 한 종목의 남녀대표팀 간에 이런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강 선배는 국가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는데 한마디로 믿음직한 사람이다. 어떤 일이라도 맡기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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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한 실력이 무지 강했다. 우리랑 붙으면 5대5였다. 북한에게 지면 작살이 났다. 그게 노이로제였다. 지바 대회를 앞두고 단일팀이 성사됐으니 최소한 북한과 맞붙을 일은 없었다. 그게 참 좋았다. 아마도 북한쪽도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쿵짝이 잘 맞았다.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단일팀이 됐고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졌다. 그래도 긴장감이 대단했다. 양측의 정보요원이 파견돼 서로 감시하고 그랬다.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조심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런 거 저런 거 눈치보면서 어떻게 훈련을 시키느냐는게 내 생각이었다. 당시 훈련을 할 때에도 취재진이 엄청났다. 외신기자들까지 포함해서 취재진만 백명은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코칭을 단일화해서 해야 하니까 남측이 여자, 북측이 남자를 맡아 훈련시키고 일주일뒤에는 서로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여자팀을 먼저 훈련시키게 됐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났는데 (훈련을 맡아야 하는)북한의 조남풍 형(당시 북쪽 여자코치)이 “그냥 너가 또 하라우”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했다. 3주째가 됐는데 계속 나보고 지도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혼자 하는 것은 아닌 것같아 고사를 했는데 북한의 장웅위원장이 나를 불러서 “이유성 지도원은 편파적으로 안하고, 공정하게 잘하고 있으니 계속 해라. 여자선수들이 예민한데 (남과 북이)유성 지도원에게 하라고 다 합의했다”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계속 훈련을 시키게 됐다.
스포트라이트를 혼자 받게 된 셈이다. 물론 남풍이 형에게는 미안했지만 더 책임감을 갖고 정말 열심히 했다. 북측의 이분희가 간염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닌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기자들을 속여가면서 요령껏 이분희의 훈련량을 줄이기도 했다. 결승전에서 이분희 대신 유순복을 출전시켰는데 덩야핑과 가오쥔을 물리치고 단체전 우승을 차지하게 됐다. 컨디션이 안좋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분희를 위해서 내가 매일 저녁 초밥을 사다가 갖다주곤 했다. 이런 일이 쌓이다 보니 북측 인사들도 내 말이라면 다 믿게 됐다. 나중에는 남측 대표팀 스폰서를 맡았던 S사 제품을 로고가 박힌채 북측 선수들이 그냥 입을 정도로 서로간의 신뢰가 쌓였다.
남북이 헤어지던 날 현정화와 이분희가 눈물의 이별을 한 것이 널리 알려졌지만 나랑 남풍이형은 몰래 화장실에서 서로 깨안고 울었다. 울다보니 대회 기간내내 같이 있었던 북한 보위부 간부가 나를 껴안고 같이 울고 있더라. 우리 안에서는 ‘작은 통일’이 이뤄졌던 거다. 일본에서 민단과 조총련이 합동응원을 펼친 것도 분단 이후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바 세계대회에서의 경기 장면은 이후 10년 이상 북한방송에서 계속 방영됐다고 한다. 내가 유순복이 경기를 할 때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장면도 계속 방영됐던 거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금강산 관광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북한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유성 지도원은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해 나도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북측 조남풍 코치와의 우정도 한국 체육사에 남을 일화인 것같다. 그후 소식도 궁금하다.지바에서 헤어질 때 남풍이 형이 나에게 세가지를 신신당부했다. 이후 국제 대회에서 ‘내가 안보이더라도 안부를 묻지 말고, 편지를 보내지 말고, 선물을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바 대회가 끝나고 나는 계속 국제대회에 나갔지만 정말로 남풍이 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 상반기에 태국 방콕에서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남풍이 형이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으로 출전했다. 북한은 대회가 참가하지 않아 감시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10여년만에 호텔에서 만나 해후를 나눴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과거에는 스포츠가 이처럼 남북교류에서 큰 일을 했는데 최근 몇년간은 남북 관계가 너무 경색돼 안타깝기도 하겠다.나도 이제 체육계에서 마무리를 고민해야 하는 나이다. 내가 마지막까지 체육계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남북관계에서 스포츠를 통해 어떤 돌파구를 찾는 것이면 좋겠다. 지바때도 남북관계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고 단일팀의 가능성이 컸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북한의 핵문제로 관계가 어렵지만 스포츠를 통한 남북교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이뤄질 수도 있다.
어쩌면 스포츠가 앞장서서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남북이 가장 자신있게 손을 잡을 수 있는 종목은 탁구라고 확신한다. 우리 남북 탁구인들은 통일의 초석을 깔았다는 자부심을 항상 갖고 있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탁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하고 싶은 것이 체육인으로서 남은 나의 마지막 꿈이다.
-경기인 출신이 평사원으로 대기업에 입사해 10년 넘게 임원으로 재직하는 것은 흔치 않은 사례다. 후배 체육인들에게도 롤모델이 될 법한데.분명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나도 이렇게까지 될지는 몰랐다. 다만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면 경기인 출신들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운동을 잘하는 사람은 머리도 좋다. 책임감도 강하고 의리도 있다. 이런 덕목들은 대기업같은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내가 우리 회사에 무슨 큰 기여를 한 것도 아니고, 처음에 관리직 제의를 받았을 때 두려움도 컸었다.
하지만 조직을 우선시하고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경기인 출신들이 지니고 있는 강점이다. 나는 그런 기회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체육인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피하지 않고 돌격하고, 부딪히는 적극적인 마인드가 있다. 이런 돌쇠같은 스타일도 조직에 필요한 법이다. 내가 이제 (체육인 출신 대기업 임원으로)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그러면 후배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고, 그들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06년 단장이 되면서 프로배구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탁구인으로 평생을 살아오다가 프로배구팀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경기인 출신 단장이기 때문에 더욱더 현장에 깊숙히 관여하거나 참견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원하고 도와주는 것이 단장의 역할이다. 배구단도 그런 생각으로 운영한다. 처음 배구단을 맡았을 때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2~3년을 그냥 지켜봤다. 이후 한 시즌에 한두번 정도는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긴장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죽기살기로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그렇게 했다. 지난 시즌에도 싫은 소리를 몇번 했다. 구단은 선수가 원하는 것을 100% 해줄 수가 없다. 그래도 배구단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회사에 조금이라도 이야기하는 부분을 내가 적극적으로 했다. 지금은 탁구선수보다 배구선수들에게 더 정이 많이 든 것같다.
-대한항공 배구단은 V리그 출범이후 리그컵과 정규리그 우승을 해봤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는데.지난 시즌에도 우승을 노리고 선수들을 좀 다구치고 그랬다. 결과적으로는 용병싸움에서 실패했던 것같다. 대한항공은 잘 하는 팀의 단계까지는 갔다. 그러나 일등 수준까지는 아직 올라서지 못했다. 우승을 하려면 좀 더 과감한 투자도 하고 무리도 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국내 배구는 그동안 용병싸움에 너무 희비가 엇갈렸다.
그런데 용병 영입은 상당히 운도 따라야만 한다. 이번 시즌부터는 남자배구도 트라이아웃을 도입했다. 우리 팀이 우승에 도전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여건이 조성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시즌을 앞두고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오래 지냈던 박기원 감독을 영입한 것도 우승을 위한 승부수라고 보면 된다. 한선수 김학민 등 우리 팀의 에이스이자 국가대표팀 핵심 선수들이 박 감독에 대한 신뢰가 높다. 박 감독도 이런 선수들을 잘 알고 있다. 이번 시즌을 위해서 감독이 외국인 코치를 원해 네덜란드 지도자를 팀에 데리고 왔다. 이번에는 우승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선수 코치 감독 단장을 모두 역임했는데 무엇이 가장 어려웠나.단장이 제일 어렵다. 감독은 일단 자기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그러나 단장은 자기 그림을 그리면 팀이 망한다. 감독의 권한을 인정하고, 감독이 조금 부족해 보여도 단장은 참고 인내해야 한다. 감독은 (경기가 잘 안풀리면)가끔 폭발을 해도 되는데 단장은 그냥 삭여야 한다. 단장 10년에 생긴 것은 속병밖에 없다(웃음).
-2009년 연세대에서 프로스포츠 구단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도 받았는데.지도자 시절의 현장 경험만 가지고 단장직을 하면 안된다고 느꼈다. 경험과 이론이 함께 가야 한다. 단장은 구단 전체를 매니지먼트하는 직업이다. 배워야 한다. 수업을 들으러 가도 내가 모든 것을 알아듣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하나를 배우면 그것을 새끼칠 수 있는 능력은 있다고 생각한다. 단장직을 잘 수행하려면 이론적인 뒷바침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현장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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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독을 할 때는 선수들의 모든 사생활까지 다 관연했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감독은 체육관에서의 역할로 끝나야 한다. 또 현장에서도 역할 분담이 잘 이뤄져야 한다. 체력파트는 전문 트레이너가 맡고, 선수들 심리는 카운셀러가 맡는 식으로 말이다. 감독이 혼자 이 모든 것을 다 하려는 것은 아닌 것같다. 우리 팀은 이번 시즌에는 심리 카운셀러를 도입하려고 한다. 단장은 이런 모든 것을 제대로 셋업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컨트롤하는 것은 결국 구단이 할 수밖에 없다. 감독은 철저한 역할 부담 아래 현장을 총괄하고, 단장은 구단의 미래를 포함해 모든 것을 셋업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구단에서 이런 일을 정착시키는 것이 나에게 주여진 숙제다.
-대한항공 스포츠단은 실업 스피드스케이팅팀을 국내 최초로 창단했다. 조양호 회장이 평창 올림픽 유치에 큰 일을 했고 얼마 전까지 조직위원장을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퇴임하기도 했는데.우리 회장님이 올림픽 유치에서부터 최근 조직위원회 일까지 평창에 정말 많은 기여를 했다. 평창 올림픽에는 회장님의 열정이 구석구석 배여있다. 회장님이 체육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창에 바쳤던 노력을 체육계가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우리 팀에 속해있는 이승훈은 평창 올림픽이 마지막 도전이다. 현재 대표팀에서 잘 훈련을 하고 있다. 모태범은 조금 슬럼프에 빠져있는 것같다. 대표팀에서 나와서 우리 팀의 지원으로 네덜란드나 캐나다쪽으로 장기 해외훈련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다. 회장님이 조직위에서 나오신 것과는 별개로 우리 빙상팀이 평창 올림픽에서 국민의 기대에 걸맞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할 계획이다.
-체육계에서는 이유성하면 불같은 성격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친화력이 돋보인다고 하기도 하는데 어떤 면이 진짜인가.성질은 불같다.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성질을 막내면 서운해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실속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원석 회장님이 대한탁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시절에 포상금은 정말 원없이 많이 받아봤다. 하지만 내 아내에게는 한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 베풀었다. 나는 속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어수룩하고 손해보는 것같은 사람이 오래 간다.
-훗날 이유성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우리 나라는 개발도상국에서 이제 일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 그 과정속에서 내가 살았다. 내가 선수였을 때, 지도자였을 때는 체육계에 우격다짐도 많았다. 지금 기준으로는 옳지 않은 관행도 많았다.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다. 스포츠 강국에서 스포츠 선진국으로 바뀌고 있다. 지도자들은 이론과 현실을 접목하고, 선수들도 지덕체를 두루 갖춘 인격체가 돼야 한다. 대한항공 스포츠단의 소속 선수들을 이렇게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유성이란 사람은 훗날 열성과 정성을 가지고 체육계를 위해서 일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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